평안남도 순천 출생이다. 1904년 순천읍 순천관(順川館)에서 향리의 군중을 모아 놓고 독립사상을 알리는 데 전력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1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하와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교포 등에게 무료로 의료사업을 전개하며 독립사상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1918년 1월에 귀국하였다가 그해 12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독립운동의 터전 구축을 모색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가담하여 제4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평안도대표의원에 선임되었다.
이어 7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의 하나인 재상해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7월 8일 제5회 의정원에서 초대 군무위원장(軍務委員長)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자격으로 국채 통칙(國債通則)·공채 발행건 등을 의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2,000만원의 공채를 발행하도록 주선하였다.
1919년 8월 미국 의원 시찰단이 중국에 들렀을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서 독립청원서를 의원들에게 전달하는 등 외교 공세를 취하였다. 1920년 2월 상해거류민단 사무소에서 대한적십자회 간호양성소를 설치해 교포들의 권익 옹호에 기여하였다.
3월에는 임시회계검사원에 임명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회계감사를 철저히 진행시켜 재정 문제를 분명히 처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다.
1920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차장 겸 외무총장대리에 임명되었다가 6월에 외무차장으로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비서 김립(金立)이 러시아로부터 1차로 받은 독립투쟁지원비 중 40만 루블을 횡령한 사실을 확인하고, 나머지를 받아내기 위해 안공근(安恭根)과 함께 러시아에 갔으나 러시아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독일·미국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35년 10월 미국 아퍼트제약회사의 동양 특파원으로 가장하고 귀국하던 중 요코하마항[橫濱港]에서 붙잡혔다.
1935년 11월 9일 동삼성(東三省) 괴뢰국 황제 부의(傅儀)의 일본 방문이 결정되자 위험 인물로 지목되어 국내로 압송당하였다. 그 뒤 악독한 일제의 고문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