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개항기 농상공부협판, 법무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후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그런데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며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 그 뒤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하면서 복직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한 밀사 이상설(李相卨) · 이준(李儁) 등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다. 보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양옥 대건물로 신축해 다시 개교할 때 유지로 남겼던 1,000루블의 거액이 기금으로 쓰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속음청사(續陰晴史)』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이범진의 자결 순국과 러시아와 미주 한인사회의 동향」(박병률, 『한국학연구』26, 2012)
주석
-
주1
: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이세의 주창으로 1899년과 1907년에 세계 여러 나라의 대표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모여 군비 축소와 세계 평화를 논의한 국제회의. 국제 분쟁의 평화적 처리 협약, 독가스 및 특수 탄환 사용 금지의 선언 따위를 채택하고 국제 중재 재판소를 설치하였는데, 2차 회의 때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여 당시 일본의 대한 제국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호소하고 밀서를 전달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우리말샘
-
주2
: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