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청북도 진천 출신.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다.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 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했으며, 11월 초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5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이상설은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참찬이었지만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상소를 올려 고종은 사직(社稷)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조약체결 직후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疏首)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봄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8월경 그 곳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 7월경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대한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控告詞)」를 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다. 또, 헐버트와 이위종·송헌주(宋憲澍)·윤병구(尹炳球)를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 해 8월 본국 정부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부터 1909년 4월까지 미국에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포를 설득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승만(李承晩)과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국민회(國民會)총회장 정재관(鄭在寬), 부회장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의 제1회 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 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해 이 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해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1911년 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