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은 일제강점기 일진회 총재, 중추원고문, 백작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정치인이다. 기업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8년(철종 9)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했다. 조선 말기에 사헌부 감찰, 중추부 도사 등을 지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했고, ‘정미칠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 『조선일보』·조선농업㈜·고려요업㈜ 사장 등을 지냈다. 그가 사망하자 일본 천황이 애도했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조문했다. 도쿄 야스쿠니신사에서도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1858년 8월 20일 함경도 장진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연사(蓮史), 도호는 제암(濟庵)이다. 아버지는 율학훈도 송문수(宋文洙)이다. 조선 말기에 사헌부 감찰, 중추부 도사, 흥해군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 일진회 총재 등을 역임하였는데, '정미칠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과 『조선일보』 · 조선농업㈜ · 고려요업㈜ 사장 등을 지냈다. 1925년 2월 1일 사망하였는데, 일본 천황이 포도주 12병을 내려 애도했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조문했다. 남산정에서 장례식이 치러질 때 도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도 추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사후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이 추서되었다.
어린 시절을 향리에서 보내다 상경하여 당시 세도가인 민영환(閔泳煥)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3월 무과에 급제하고, 거듭 중시(重試)에 합격해 무관으로 수문장에 임명되었다. 1872년 4월 훈련원 주부(主簿) 겸 사과(司果), 9월 훈련원 판관 겸 첨정(僉正), 1874년 6월 오위도총부 도사(都事), 1875년 4월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온 일본 특명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일행의 반접(伴接) 수행원을 맡았다. 이후 일본의 대표적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함께 부산에 본인 명의로 상관(商館)을 개설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가재가 불탔고, 1884년 갑신정변 때에도 가옥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
이후 일본인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1885년 귀국했다. 1886년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도리어 김옥균의 인품에 공명해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通謀)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100일 후 풀려났다. 같은 해 7월 중추부 도사가 되었고, 1887년 7월 친군후영대관(親軍後營隊官), 1888년 8월 평안도 영원군수, 1889년 9월 경상도 흥해군수, 1890년 5월 경기도 양지현감, 1891년 9월 친군장위영영관(親軍壯衛營領官)을 역임하였다. 1895년 개성인삼을 다량 밀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郎]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타이완, 홋카이도 등을 돌아다녔다. 일본 각지를 두루 다니며 일본 정치인과 명사를 만나는 한편 야마구치현 아부군 하기정[萩町]에서 양잠, 제사, 직물염색 연습소를 창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병참감 일본 육군 소장 오다니 기쿠조[大谷喜久藏]의 군사통역으로 귀국하였다. 통역관으로 경성군사령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같이 청국까지 종군하였다. 그해 4월 서울에 돌아온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전되는 것을 보고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였다. 1904년 8월 18일 윤시병(尹始炳) · 유학주(兪鶴柱)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20일에 다시 일진회(一進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해 12월 동학교도 조직인 진보회(進步會)와 통합하여 전국 최대 규모의 정치결사가 되었다. 일진회에서 일본군의 북진을 위한 함경도지방 군수물자 수송담당과 함경도에서 간도(間島)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에 대한 동태를 정찰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일본이 경의선 철도부설공사를 서두르자, 이 공사의 노역(勞役)에도 거의 무상으로 일진회원들을 내보내어 적지 않은 인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1905년 1월 일진회 평의원장에 임명되어 일진회가 주최하는 각종 연설회에 수십 차례 변사로 활약했고, 7월 상업회의소 감독, 11월 일진회 특별평의회 평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10여 일전에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으로 외교권 이양을 주장하는 「보호청원선언서」를 발표해서 지탄받았고, 12월 일진회 지방총장이 되었다. 1906년 6월 서경전각 영건 감동(西京殿閣營建監董) 및 역비 독쇄관(役費督刷官)에 임명되었고, 8월 총무원으로 일진회 회장대리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 2대 사장으로 취임해 1907년 5월까지 재임했다. 당시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한일연방(韓日聯邦)을 언급하자 고종을 폐위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07년 2월 평원철도기성동맹회 찬성원으로 활동했으며, 5월 박제순 내각이 총사퇴하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완용(李完用)이 “고종의 의사에 반하여 통감의 지도를 따를 자이다.”라며 천거했다. 같은 달 이완용 내각이 수립되자 농상공부대신 겸 광산사무국 총재로 임명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동원해 고종의 양위를 선두에서 지휘하였으며, 어전회의에서도 이를 강요하였다. 7월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 한일신협약) 체결에 앞장서 ‘정미칠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같은 달 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 위원장, 9월 평양광업소 총재를 겸했으며, 10월에는 이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같은 달 일본 황태자의 한국 시찰을 환영하는 대일본황태자전하 봉영(奉迎) 한성부민회 고문을 맡았고, 같은 목적으로 조직한 신사회(紳士會)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1월 진황지 개간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농업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으며,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 유학 때 배종을 하였다. 일본에 체류하며 조선과 타이완 식민화를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결성된 동양협회(東洋協會)에 거액을 기부하여 회원이 되었다.
1908년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6월 내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09년 2월 순종의 지방순행을 수행하다 시종무관(侍從武官) 어담(魚潭)과 충돌하여 내부대신에서 물러났다. 곧이어 일진회 총재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를 만나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1억 엔을 요구했다. 일본 내각에 「일한합방의 선결문제」, 「일한합방 후의 한국제도」 등의 문건을 제출하면서 한일합방을 주장했다. 8월 일본에 머물고 있으면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2월 일진회장 이용구와 협의하여 「정합방상주문(政合邦上奏文)」을 순종과 이완용 내각 및 통감부에 제출하고, 「국민 2천만 동포에게 서고(誓告)」라는 성명서를 발표해 병합여론을 조성하였다.
국권 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11년 8월까지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고, 8월 29일에는 병합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실었다. 1912년 3월 연초회사 설립을 준비했고, 7월 경기도 대지주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1월 경성거류민단에 교육기본금 550원을 기부해서 은배(銀杯)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7월 조선무역㈜ 창립 발기인과 조선귀족을 위한 식림사업을 하는 보식원(普植園) 간사로 선출되었다. 1914년 9월 조선농업㈜ 사장 명의로 경성군인후원회에 기부금을 냈고, 시정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부 평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 1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상의원에 선출되었고, 4월 특별유공회원으로 300원을 기부했다. 같은해 1월 조선총독부 시정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는 「조선귀족의 책임」(『매일신보』1915.1.1.)이라는 글을 실었으며, 11월에도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한 후 그 소감을 「실로 이천만민의 광영(光榮)」(『매일신보』1915.11.20.)이라는 글로 지었다. 같은 달 처 김씨와 함께 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그해 말 경기농사장려회 부회장을 맡았다. 1916년 1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과 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회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18년 4월 도장관의 자문기구인 경기도 참사(參事)에 임명되었고, 6월 충청북도 영동군 면사무소 건축비를 기부하여 목배(木杯)를 받았으며, 8월 경성구제회에 1,0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에서 장의 총무계 및 고문을 맡았다. 3 · 1운동 후 정무총감이 되기 위해 일본 정계에 운동을 벌이는 한편 일본수상 하라 다카시[原敬]에게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홋카이도에 있는 막대한 토지를 불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1925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송병준의 재산정리목록에 홋카이도 가와카미군에 560만 9041평, 당시 시가로 5만 6000엔에 달하는 토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0년 4월 왕세자 이은 결혼에 대한 공로로 금배(金杯)를 받았고, 11월에는 총상협회(總商協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12월에는 백작으로 특별 승작되었다.
1921년 4월 중추원 친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1925년 타계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1년 4월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가 운영하던 『조선일보(朝鮮日報)』 판권을 인수하고 사장을 역임하다가 1924년 9월 신석우(申錫雨)에게 매각했다. 1921년 8월 아들 송종헌(宋鐘憲) 등과 함께 조선소작인상조회를 발기하여 회장을 맡았고, 9월 산업조사위원회 경기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22년 3월 조선건축회 명예회원, 7월 경성교풍회 회장, 10월 조선흥업은행 발기인, 1923년 1월 조선도서인쇄㈜ 창립 발기인, 7월 조선일보사 대표로 부업공진회(副業共進會) 촉탁으로 활동했고, 10월 잠업 장려에 대한 공헌으로 부업공로자표창을 받았다. 1920년대 금강산전기철도, 대전전기, 조선상업은행, 중앙물산 등의 주식회사에 대주주로 참여했고, 1923년 고려요업㈜ 사장을 지냈다. 1924년 4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발기인 겸 고문에 위촉되었다.
송병준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 · 7 · 9 · 13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52∼78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