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의 이른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6,000여 명이 넘는 재일 한국인이 학살되고, 산미증식계획, 수리조합의 강행으로 말미암아 우리 농민의 몰락이 촉진되는 등 민중의 반일 감정이 크게 앙양되어 독립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이 급진전되자 이를 압살하려는 의도에서 1924년 4월에 조직하였다.
동민회 결성과 때를 같이해 4월 10일 일본의 폭력단인 박춘금(朴春琴)·이기동(李起東)의 노동상애회(勞動相愛會)까지도 공공연히 활동시킨 것만 보아도 일제의 속셈을 알 수 있다.
동민회의 이러한 성격은 간부 진용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발기인은 만철경성관리국장(滿鐵京城管理局長) 안도(安藤又三郎), 경성상의회두(京城商議會頭) 구기모도(釘本藤次郎), 실업가 아라이(荒井初太郎) 등 경제계의 굵직한 인물들과, 박영효(朴泳孝)·송병준(宋秉畯)·조진태(趙鎭泰)·한상룡(韓相龍) 등 부유한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다. 고문은 일본 경제계의 거물인 시부자와(澁澤榮一) 등이, 실무는 사토(佐藤虎次郎)·나카무라(中村健初郎), 도지사를 지낸 신석린(申錫麟) 등이 맡았다.
강령에서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 질실강건(質實剛健)의 기풍, 양성·근면역행(勤勉力行)의 기풍 등을 강조하였으며, 창립 후 계속 시부자와 등 일본 재계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 운영하였다.
강연회·강습회를 통해 독립사상·사회주의사상의 배척, 미풍양속의 선양, 노자협조(勞資協調)·농촌진흥·사회개선을 선전하면서 1930년대 중기까지 존속하며 대대적인 반민족적 정치 선전을 감행하였다.
식민지하 우리 나라 자본가들이 일본인과 함께 조직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로서 식민지하 예속 자본가의 성격을 여실히 나타내 주는 단체이다. 기관지로 ≪동민 同民≫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