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동광회 총지부를 설치하였다. 1922년 2월 3일 대륙 낭인(大陸浪人)들이 증심이 되어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흑룡회(黑龍會)의 간부였던 도야마(頭山滿)·우치다(內田良平) 등 일찍부터 한국 침략에 활약한 바 있는 인물들이었다.
처음 계획으로는 친일파 박영효(朴泳孝)와 장석주(張錫周)를 각각 회장·부회장에 앉히고, ‘동양 민족 공통의 문화 개발’이라는 허울좋은 간판을 내걸고 유림 세력을 끌어넣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뜻과 같지 못해 러일전쟁 때부터 친일 분자인 이희간(李喜侃)을 총지부장에 앉혔다.
동광회는 다른 친일 단체와는 달리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결성된 것이 아니고, 총독 정치를 비판할 자료를 수집해 금전을 얻어내려는 야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취지서나 운동에 마치 총독 정치를 비판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들이 보이나 그것은 모두가 기만적인 것이었다.
동광회 총지부는 각 도에 지부를 두고, 통감부 시대에 군수와 군서기를 지낸 친일파와 양반 유생의 낙오자들을 끌어 모아 조직하였다. 동경의 동광회 본부는 1922년 동광회시찰단을 우리 나라에 파견해 ≪동광회보고서≫라는 것까지 만들어, 마치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놀음도 하였다.
또한, 총지부장 이희간으로 하여금 내정독립기성회를 만들게 했는가 하면, 정훈모(鄭薰模)를 시켜서는 4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내정독립청원서라는 것까지 만들어 일본국회에 제출하게 하는 연극도 감행하였다.
이러한 기만적 행동에 아무도 속아넘어가지 않았지만, 조선 총독부도 이러한 동광회의 운동이 치안 유지에 유해하다는 판단 아래 그해 10월 내정독립기성회를 해산시켰다. 그 뒤 동광회 자체도 급속히 쇠퇴하고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