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의 고위급 관료와 재류 일본인 부호가 주동이 되어 일부 한국인 대지주와 예속자본가, 직업적 친일분자가 참가하여 1921년 11월 10일 발족되었다. 발기인 70명 중의 22명, 이사 20명 중의 4명만이 한국인 친일파였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일본인과 한국인의 합작단체 중에서도 완전히 일본인이 주도하는 친일단체라 하겠다. 발기인을 보더라도 총독부의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 내무국장 오쓰카(大塚堂三郎) 등의 국장급 관료를 비롯해 이키다(生田淸三郎)와 같은 총독부 관료, 재류 일본인 유력자 이시하라(石原磯次郎)가 가입하고 있었다.
한편, 친일파의 발기인에는 박영효(朴泳孝)·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민영기(閔泳綺)·이재극(李載克) 등의 조선귀족, 조진태(趙鎭泰)·한상룡(韓相龍)·백완혁(白完爀)·백인기(白寅基)·민대식(閔大植)·김한규(金漢奎)·박승직(朴承稷)·장도(張燾)·엄주익(嚴柱益)·김명준(金明濬) 등의 대지주·예속자본가·직업적 친일분자, 원응상(元應商)·이진호(李軫鎬)·장헌식(張憲植) 등의 친일관료 출신자 등, 당시의 제일급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단체의 취지서에는 당시 일본의 교순사(交詢社)나 일본구락부(日本俱樂部)처럼 일본지배층의 사교단체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고, 친목과 내선융합(內鮮融合)을 위한 상호의 의사소통의 친목단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의 속셈은 3·1운동 후의 한국민중의 반일감정의 격화에 대처하여 동요하고 있던 친일파를 재결속시키며 친일세력을 고무, 격려하는 데 이들 제일급 친일파를 이용해보려는 것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