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4년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에 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었다.
1925년에는 화재로 인해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이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매입하여 2007년 2월에 덕수궁에 추가로 편입되었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덕수궁이 아직 경운궁(慶運宮)일 당시, 우리나라에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이다. 대지 2,399㎡(727평), 건축면적 877.8㎡(236평)의 양식(洋式) 2층 벽돌집이다.
1983년 서울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서울시에서 관리하였으나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 등기 되고(2006년 9월) 2007년 2월에 사적으로 덕수궁에 포함되면서 서울시 유형문화재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지하1층, 지상2층의 단순한 벽돌집이지만 1층의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가 꾸며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이 자리는 경운궁 안 평성문(平成門) 밖이었다.
1925년의 화재로 인하여 벽면만 남았던 것을 복구하여, 원형과는 다소 달라져 있다.
우리나라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이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시련의 근대사를 간직한 현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