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1900년 사이에 행해진 중건 과정에서 수옥헌(漱玉軒: 뒤에 重眀殿으로 고침) · 정관헌(靜觀軒) · 구성헌(九成軒) 등이 지어졌고, 1900년에서 1910년에 걸쳐 석조전(石造殿)이 지어졌다.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일본 및 서양세력의 진출로 인하여 경운궁 부근인 정동일대에는 일찍부터 러시아 · 영국 · 일본 · 미국 등 열강의 영사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경운궁(慶雲宮)을 중건한 시기는 바로 이들 세력의 영향으로 왕조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결과 경운궁 중건 당시 정통적인 궁실제도를 부분적으로 따르는 한편, 정전(正殿)이 있는 구역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지역에는 양관을 세웠다.
설계자들도 외국인들이었으므로 건축공사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었고, 전통적인 조영체제 및 기술과의 접맥 없이 그대로 이식되었기 때문에, 한국건축사상 근대를 열지 못하고 피상적인 수용에 그쳤다.
현재 덕수궁 안에는 석조전과 정관헌이 남아 있고, 궁 밖 서쪽 미국영사관 옆에 있는 중명전은 개인 소유였으나 2007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매입하여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석조전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사용하고 있으며, 규모가 정면 17칸(54.2m), 측면 10칸(31m)인 3층 석조건축으로서, 기단부인 1층은 시중인들의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 · 황후의 침실 · 거실 · 욕실 및 담화실 등으로 설계되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리스(Doris)식 오더(order: 지붕과 기둥을 기본단위로 한 형식)로 열주랑(列柱廊)을 구성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고 거기에 각각 박공(牔栱: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을 두었다. 이는 건물 앞의 정원과 더불어 18세기 유럽의 궁전건축을 모방한 것으로, 신고전주의양식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순수 석조로 된 유일한 건물로서 의의가 있다. 설계자는 영국인 하딩(Harding,G.R.)이다.
한편, 정관헌은 함녕전(咸寧殿)의 북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연유(宴遊) 장소로서, 전통적 요소와 서양식 요소를 절충한 특이한 건물로 설계되었다.
즉,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바깥두리기둥으로는 처마를 받치고, 안두리기둥으로는 천장을 받쳤으며, 지붕은 안두리기둥이 받친 부분에만 팔작지붕을 씌우고 바깥두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분은 지붕을 덧달아 내어 퇴를 구성하고 있다.
구리로 만든 난간을 기단의 동 · 서 · 남면에 두르고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이 가운데 북쪽 계단은 벽돌로 둘러 막은 내실로 통한다.
난간동자기둥 위에다 나무를 깎아 코린트식 오더를 기둥머리까지만 만들어 세웠으며, 이 위에는 네모난 나무기둥을 세우되, 그 표면에는 꽃을 꽂은 꽃병을 새기고 채색하고 식물무늬를 투각하여 장식적으로 꾸미고 있다.
안쪽의 독립기둥은 기둥 밑에서 기둥머리까지를 한 개의 돌로 만들되, 둔중한 느낌을 주는 기둥머리를 로마네스크식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을 융합한 건물들로서 근대 서양건축 도입을 보여 주는 건축으로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