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시강원 설서(說書)로 임용되어 1891년 홍문관 전한에 올랐다. 시강원 문학(文學)을 거쳐 1891년 7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1895년 명성황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나섰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귀국하였다. 1896년 학부 협판으로 임명되어 한성은행 발기인, 육군 부령, 중추관 의원, 법부 협판, 고등재판소 판사, 프랑스 파리 만국박물회 한성본국박물사무 부원, 궁내부 협판, 사립 흥화학교 사무위원,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참찬, 학부 협판, 특명전권공사, 학부 서무대신사무, 주프랑스 · 주벨기에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였다.
1902년 주프랑스 · 주벨기에 한국공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였다. 1903년에는 육군병상군인구호협정에 서명 조인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파견되었으며, 1903년 7월 적십자 위원, 이해 11월 주영 · 주미 양국 특명전권공사로 활동하였다. 1903년 적십자회 회원이 되어 스위스에서 개최된 적십자회의에 참가하였다. 1904년 육군 참장이 되었으며, 1905년 11월부터 이듬해까지 프랑스 · 러시아 · 미국 등을 방문하여 을사늑약(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성토하였다. 1909년 규장각 지후관(祗候官)이 되었으며 1910년 4월부터 5월 20여 일 동안 경성일보사가 주최하는 제2회 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시찰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 이후 1921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1933년 6월까지 일제 지배정책에 협력하였다. 1925년 조선불교단 본부 평의원, 조선박람회 평의원, 조선고아구제회 고문, 친일단체 동민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이 주재하는 시국간담회에 참석하였으며, 이해 9월 국방헌금으로 50원을 헌납하였다. 1948년 11월 16일 사망하였다. 1901년 대한제국으로부터 태극장(훈2등), 1902년 프랑스정부로부터 상훈기를, 일본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합병기념장과 1928년 쇼와[昭和]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민영찬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06∼71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