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학교는 교장 민영환, 교사 임병구(林炳龜), 정교(鄭喬), 남순희(南舜熙)로 구성되었으며, 설립 당시 기금과 운영자금은 김신영(金信營)이 제공하였다.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누었으며, 보통과의 졸업 연한은 3년, 고등과는 2년이었다.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 30세 미만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교과목에서 영어를 중시하였고, 일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이후 심상과(尋常科), 특별과와 함께 당시 조선에 전국적인 토지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측량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양지과(量地科)를 설치하였다. 교육내용은 영어 · 일어 · 측량술 등이 강조되었다.
1900년 7월 13일자 『황성신문』에 당시 학생 수가 130여 명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로서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영어와 일본어 과정을 별도로 설치하여, 영어와 일어 등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근대적 학교들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던데 반해,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는 조선인이 세운 신뢰할 만한 학교로 인식되었고, 더욱이 야간 과정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1899년 12월만 해도 학생 수가 주간 47명, 야간 79명으로 126명에 달했고, 12월 말에는 주간 60명, 야간 90명, 총 150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학생 수 증가는 교사(校舍)와 재정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이에 민영환 외 여러 유지들이 출연(出捐)하여 1899년 8월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 청진동 일대인 수진동(壽進洞)으로 학교를 옮겨, 교사를 늘리고 학과를 확대하였다.
또한 흥화학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도 지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가장 보수적인 경북 지방에 2개의 지교를 설립하였다. 1899년 6월경 대구에 최처규(崔處圭)가 주도하여 사립 흥화학교를 설립하였고, 10월에는 안동에도 지교가 설립되어 안동 지방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민영환이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자결한 뒤, 교장에 임병항(林炳恒), 부교장 겸 총무 교사에 백상규(白象圭)가 취임하였다.
을사조약 후에는 설립정신을 교육구국(敎育救國)을 위한 인재양성으로 전환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에 주력하였다.
이후 경영 곤란 등의 문제로 황실과 학부(學部)의 보조금, 유지들의 의연금(義捐金) 등으로 근근이 유지되다가 결국 1911년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