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장단 출생.
미국 브라운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192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보성전문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경제학을 비롯하여 논리학을 강의하며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였다. 전쟁이 격화되자 친미파로 지목받아 교단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향리 장단의 토지를 관리하며 영농으로 소일하였다.
8·15광복을 맞이하여 건국동맹(建國同盟)을 모체로 좌우파 인사들이 모여 1945년 11월 12일에 조직한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인민당(人民黨)에 한때 몸담고 이듬해 2월 초 서울 천주교회에서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여운형과 함께 인민당계를 대표하는 최고정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비상국민회의가 발족 2주일 만인 1946년 2월 14일 미군정 고문기관인 남조선민주의원(南朝鮮民主議院)으로 개편될 때 이승만을 의장, 김구·김규식(金奎植)을 부의장으로 하여 과도기입법기관의 기능을 하게 됨에 따라 여운형·황진남(黃鎭南)과 함께 인민당계 대표의 민주의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정부수립 직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김규식 총재가 좌우합작 통일지향 활동에 바쁜 나날이어서 직접 관여하기가 어렵게 되자 적십자사 실무를 총괄하며 이 봉사기관의 기초를 다졌다.
1950년 5·30총선 때 장단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 제2대 국회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의정활동에 참여하려던 때 6·25전쟁이 일어나 서울 삼청동 김규식의 집에 피신하여 있다가 7월 초 보위부(保衛部)에 연행되어 갔으며, 일시 풀려나 서린동 자택에서 와병중 8월 맏아들 남진(南鎭)과 함께 잡혀 9·28 수복 직전 납북되었다.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부인 한기주(韓琦柱)가 국제적십자사와 접촉하여 미대사관으로부터 통보받은 바에 따르면 1955년경 이북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