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3월부터 1899년 5월까지 존재하였다. 1895년 3월 25일 <재판소구성법>에 의하여 이른바 근대적인 재판소제도가 도입되어 형식상 사법권이 행정권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설치되었다.
한성재판소와 인천재판소의 상소심재판소이었으며, 법부에서 임시로 개정하는 합의체였다. 재판장 1인, 판사 2인, 검사 2인을 두었는데, 재판장은 법부대신 또는 법부협판이 맡았다.
판사는 법부의 칙임관·주임관 또는 한성재판소 판사 중에서 왕이 임명하였는데, 단 협판 이하 중에서 판사를 임명할 때는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법부대신이 추천하게 되어 있었다.
검사는 법부 검사국장과 검사국소속 검사 중에서 법부대신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당시의 재판소로서 정식으로 개청된 것은 한성재판소와 고등재판소 뿐이었다. 같은 해 4월 감영(監營)·유수영(留守營)·지방재판소의 상소사건도 심리하게 되었다.
1896년 8월부터는 순회재판이 개시될 때까지 각 개항장 재판소의 상소사건도 심리하였으며, 칙임관과 주임관의 범죄도 당분간 관장하였다. 1899년 5월 30일 재판소구성법의 개정으로 평리원(平理院)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