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조약 · 일제병탄조약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측 전권위원의 결의 표명으로, ‘일본국 전권위원은 일본국이 장래 한국에 있어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동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 한국 정부와 합의한 뒤 이를 집행할 것을 여기에 서명한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넣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탈할 경우 반드시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고 집행하겠다고 국제적 약속을 하면서 열강의 양해를 구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무력으로 일거에 한국을 집어삼키지 못하고, 국제법상 한국의 황제와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 한해 합법적 형식을 취하여 완전병탄을 집행할 준비와 절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내정을 지도 감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제2차 한일협약(을사5조약)’을 작성하여 대한제국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궁궐을 포위, 위협하였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내각의 참정대신(내각수반)이 반대하였으나 5대신의 동의를 받아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끝까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서명과 옥새 날인도 하지 않아, 이 을사5조약은 체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체결되지 않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므로 전제군주의 승인과 서명날인, 비준은 조약체결의 필수 요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조약비준을 거부하자, 일제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서명날인한 조약문을 가지고, 마치 을사5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공포한 다음 이를 무력으로 강제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그 해 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外部)를 폐지하였으며, 1월 20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관 · 공사 · 영사제를 모두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해 2월 1일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문을 열었다.
이후 일제 통감부가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의 완전 병탄을 위한 공작과 정책이 강행되기에 이른다. 통감부는 즉각 고문경찰제도(顧問警察制度)를 실시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1907년 5월이완용(李完用) 내각을 수립하여 통감부 밑에 두었다.
그 해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5조약을 황제 자신이 승인하거나 서명날인하여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약 체결은 무효이며, 따라서 일제의 국권박탈과 통감부 설치는 불법이란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李相卨) · 이준(李儁) · 이위종(李瑋鍾) 세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을 트집 잡아 일제는 1907년 7월 19일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5일 후인 7월 24일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둘러 한국을 완전히 빼앗을 목적으로 7월 22일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에 이양하게 하였다.
7월 24일에는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7월 27일에는 집회 ·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방비 상태에 두기 위해 7월 31일 대한제국 군부(軍部)를 폐지하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일제의 완전병탄정책이 강행되던 1904년 여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의병무장투쟁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급격히 고양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의병운동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퍼지자 일제의 한국병탄정책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이에 대응하느라 일정이 지연되었다.
1909년 일제는 완전병탄정책을 다시 강화하기로 하고 이용구(李容九) · 송병준(宋秉畯) 등이 속한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합방론을 제창토록 교사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그 해 4월 10일 일본 내각총리 가쓰라(桂太郞),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 등과 함께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합의하였다.
1909년 6월이토가 통감직을 부통감 소네(曾荒助)에게 인계한 뒤 귀국하여 추밀원 의장직을 맡은 직후인 7월 6일,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즉시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그 해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대토벌을 실시, 한국 의병들의 항전을 종결시킨 뒤 병탄을 마감 지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계획은 다시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병탄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고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극동을 여행 중이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Kokotseff)와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던 이토가,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저격을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그 해 12월 2일 한국의 친일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李在明)의 습격으로 중상을 당해 집무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제순이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맡았으나 친일내각 구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일제는 그 해 12월 4일동경(東京)에서 낭인단체인 고쿠류회(黑龍會)가 수상의 지시를 받고 초안을 작성, 수상 가쓰라의 검열을 받은 ‘한일병합에 관한 상주문(上奏文)’과 청원서 · 성명서를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진회 간부에게 주어 서울에서 발표하게 하는 등 한일병합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파가 총궐기하여 일진회 일당을 격렬하게 성토하고 일제의 의도를 규탄하여 일제의 한국병탄 기도는 다음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일제는 안중근을 처형하여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을 종결지은 다음 서둘러 한국병탄을 강행하였다. 1910년 5월 30일 병약한 소네를 통감에서 퇴임시키고 현역 육군대장으로 육군대신인 데라우치(寺內正毅)를 통감으로 겸직하게 하였다.
또한, 6월 24일 박제순 내각에 강요하여 한국 경찰사무를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찰관제는 폐지되고, 통감부가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감부는 헌병경찰제를 채택,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지방의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찰부장을 겸임하게 하며, 헌병경찰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 경찰관 약 3,200명, 일본인 경찰관 약 2,000명, 일본인 헌병 약 2,000명, 한국인 헌병보조원 약 4,000명, 일본군인 2개 사단 등의 무력을 전국 각지에 거미줄같이 배치, 한국인의 어떠한 반항도 탄압할 수 있는 무단 체제를 갖추었다.
7월 23일 서울에 온 제3대 통감 데라우치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병합조약 초안의 대강은 물론, 병합 후의 대한 통치방침까지 내명받고, 한국에 온 즉시 한국인의 저항 발언을 봉쇄하기 위해 『대한민보(大韓民報)』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판매금지시켰다. 이어서 7월 29일 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을 다시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은 내부대신으로 하여 이완용 내각을 구성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趙重應, 농상공부대신)을 통감관저로 불러 이른바 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 주고는 수락을 얻어서 비밀리에 의논한 뒤, 8월 18일 이완용 내각의 내각회의에서 합의를 보게 하였다.
드디어 1910년 8월 22일 서울거리에 15간마다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 이른바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 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 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래부터 무효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게 마땅하다. 둘째 이 한일병합조약이 한국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일병합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 무효임을 재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