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

차지철
차지철
정치
인물
해방 이후 공수여단 대위, 경호장교, 육군중령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34년
사망 연도
1979년
본관
연안
출생지
경기도 이천
관련 사건
5·16 군사쿠데타|10·26사건
정의
해방 이후 공수여단 대위, 경호장교, 육군중령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이천 출생. 아버지 차윤염, 어머니는 김대안이며 송희성ㆍ윤보영과 결혼해 세 딸을 두었다.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한 후 장교로 승진하여 1961년 공수여단 대위로 5 · 16군사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가 10 · 26사건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4년 경기도 이천 마장면에서 출생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하여 이후 장교로 승진하였다.

1957년 미국의 포병학교와 1960년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공수여단 대위로 있던 1961년 5 · 16군사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쿠데타 이후 박치옥 공수여단장의 소개로 박정희의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정희의 신임을 얻고 정치에 입문하였다. 1962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여 민주공화당 상임위원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6년 민주공화당 경기6지구위원장을 지냈다. 1967년 민주공화당 지역구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이천 · 광주). 1969년 국회 외무위원장을 지냈고, 1970년 한양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국민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광주, 민주공화당), 그해 국회 내무위원장을 거쳤다. 35세이던 1969년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성남 · 여주 · 광주 · 이천, 민주공화당), 그해 국회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1974년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월권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마찰이 잦았고 재야와 야당문제에 강경 대응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하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강경진압을 주장하고 공수여단 투입을 주도하였다.

당시 최고 권력자이던 박정희를 사이에 놓고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金載圭)와 대립하게 되면서 지배권력의 분열을 초래했다. 결국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피살될 때 경호실장으로 현장에 있다가 함께 살해당하였다.

참고문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조갑제, 조선일보사, 1997)
『역대국회의원총람』(한국국회인물사편찬회, 조세공론사, 1983)
『우리가 세워야 할 좌표』(차지철, 법문사, 196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황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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