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성(申翊聖), 허균(許筠)과 같은 문인층,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따라 조선에 온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 15901648), 화가 이정(李楨) 등과 교유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1625년(인조 3)에 도화서 교수(敎授)가 되었고, 1628년(인조 6)에는 태조 영정을 개수하고 동반(東班) 6품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공신들의 책봉과 시상 과정을 기록한 『호성선무원종공신도감의궤(扈聖宣武原從功臣都監儀軌)』(1604~1605년)에 ‘사화(私畵)’로 기록되어 있어 도화서 입문 이전부터 국가 행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609년(광해군 1)의 『영접도감도청의궤(迎接都監都廳儀軌)』에서는 대행원역(帶行員役)으로, 1612년(광해군 4)부터 1616년(광해군 8)까지 이루어진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편찬에서는 선수화원(善手畵員)으로 발탁되는 등 17세기 중요 궁중 행사에서 활약했다.
별서도(別墅圖)를 많이 제작하며 국공(國工)으로 일컬어졌다.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1643, 국립중앙박물관]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지리산 주1를 묘사한 것으로, 실제 경관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전하던 기록을 토대로 완성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전칭작인 「산수도(山水圖)」,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등은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전통을 보인다.
절파(浙派) 주2의 영모화를 남겼고, 묵죽과 묵란에도 능숙했다. 신경진(申景禛)의 관복본(官服本)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과 사녀도(仕女圖)를 잘 그렸다는 평가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