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담채. 세로 89㎝, 가로 5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여창(鄭汝昌)의 구장(舊莊)을 이징이 1643년(인조 21)에 그린 것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花開縣舊莊圖(화개현구장도)’라는 전서체(篆書體)의 표제가 적혀 있다. 중단에는 구장이 있던 화개현(花開縣)의 산수가 그려져 있다.
하단에는 정여창의 악양시(岳陽詩) 1수, 유호인(柳好仁)의 악양정시서(岳陽亭詩序)와 시,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을 밝힌 신익성(申翊聖)의 후지(後識), 조식(曺植)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과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 중에서 정여창의 구거유적(舊居遺跡)에 관한 기사의 발췌 등이 신익성의 글씨로 적혀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일종의 기록화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계회도(契會圖)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은 이징에게 요청하여 그린 것이다. 이징이 직접 현지에 가서 실사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록들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임을 하단에 적힌 신익성의 발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 기록화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징이 만 62세 때인 1643년에 제작한 것이 신익성의 발문에 의하여 확실하게 밝혀졌다. 이로써 연기(年記)를 철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였던 이징의 화풍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의 양상을 고찰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이징의 원숙한 산수화 솜씨가 잘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격조가 높고 안견파(安堅派) 화풍의 17세기적 양상을 잘 보여 준다. 오른쪽 종반부(縱半部)에 무게가 치우쳐 있으면서 근경(近景)·중경(中景)·후경(後景)이 갖추어진 이른바 편파3단구도(偏頗三段構圖)를 이루고 있다. 좌우로 확산된 공간의 표현이 두드러져 조선 초기 이래의 안견파 산수화의 전통이 역연하다. 그러나 산과 바위의 표현에는 흑백의 대조가 엿보이는 등 절파적(浙派的) 요소도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이징과 조선 중기의 산수화 및 유교 문화의 고찰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