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군민(軍民)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1709년(숙종 35)에 처음 그려졌으나, 지금 남아 있는 작품은 1760년(영조 36) 동래 출신의 화원 변박에 의하여 개모(改模)된 것이다. 원래는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되어 있었다.
치열하였던 교전(交戰)의 전말(顚末)을 한 화폭에 효율적으로 담기 위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의 조감법(鳥瞰法)을 사용하였다. 그림 중앙에는 동래부의 성곽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수비하고 있는 동래부 병사들과 이를 공략하기 위하여 반달형으로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왜병들을 그려 넣었다.
화면의 근경이 되는 부분에는 길을 빌리자는 목패(木牌)를 든 왜군을 향하여,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는 팻말을 성밖으로 던지고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성을 공략하는 왜병들의 모습이 보다 크게 그려져 있어 당시 전력의 심한 격차를 말해주는 듯하다.
화면의 상단부에 능선의 윤곽선을 따라 미점(米點)이 가해진 경직된 모습의 산악과 선염(渲染)으로만 처리된 윤곽뿐인 산악이 중첩된 산군(山群)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졌다. 그리고 왜군들이 무너진 성을 넘어 난입하는 장면 및 이를 피하여 성밖으로 도주하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아랫부분에는 붉은 조복(朝服)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단좌(端坐)하고 있는 송상현을 중심으로 한 순절 장면이 묘사되어 있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한 이 그림의 목적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림의 주제에 비하여 화격(畵格)은 그리 높지 못하여 필치(筆致), 형태 등에서 다소 경직된 면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