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중화(中和)이다. 자는 치남(雉南), 호는 석연(石然) · 패강노어(浿江老漁)이다. 평양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황해북도 출신의 이희팔(李羲八, 1796~?)에게 그림을 배웠다. 셋째 아들 양영진(楊英鎭, 18811918)도 화가로 활동했고, 제자로 김유탁(金有鐸, 18751940 이후)이 있다.
1891년(고종 28)에 숭인전 참봉에 임명되었다. 1905년 5월 해주 승첩비각 개수 때의 공으로 6품에서 정3품으로 올랐다. 6월에는 평양의 풍경궁(豊慶宮) 참서관(參書官)으로 임용되었으나 곧 의원면직 되었다.
양기훈은 평양과 서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평양에서 활동하던 이희수(李喜秀, 18361909), 1890년(고종 27)경 평양에 머물렀던 지운영(池運永, 18521935)과 교유하였다. 또 1906년에 조직된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여 김규진(金圭鎭, 18681933), 김윤보(金允輔, 18651938) 등의 서화가와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양기훈은 수묵을 구사하고 당송시를 적어 넣은 문인 취향의 노안도(蘆雁圖)를 선보였다. 갈대밭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장면을 그린 노안도는 노후의 평안[老安]과 음이 같아 축수(祝壽)용 병풍으로 인기가 높았다. 양기훈의 화풍은 아들 양영진, 김윤보, 문화선(文化善) 등 평양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