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파는 산수화의 대가 안견과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키는 미술유파이다. 안견파의 산수화 작품들은 구도와 구성 등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각 폭의 그림은 한쪽에 무게가 쏠려 있고 반대쪽은 가볍게 묘사되는 편파구도를 이룬다. 또 각 폭은 몇 무더기의 경관들로 짜여져 있으며 시각적 연결성을 드러내는 구성을 보인다. 안견파화풍은 석경·양팽손·김시·이정근 등 무수한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기록화와 소상팔경도 등의 감상화가 대부분 안견파화풍으로 그려졌다. 일본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의 회화 발전에 기여했다.
안견파 화가들이 창출한 화풍을 ‘안견파화풍’이라고 부른다. ‘안견파’라는 용어는 안휘준(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 의해 명명되었다. 안견파의 초기 화풍은 안견의 유일한 진작(眞作)인 일본 덴리(天理)대학 소장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등의 일부 전칭(傳稱)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붓을 잇대어 써서 필획의 흔적이 되도록 두드러지지 않도록 구사하는 필법(筆法), 수묵(水墨)을 위주로 하되 농담(濃淡)이나 윤갈(潤渴)의 강열한 대조보다는 담백함을 중시하는 묵법, 산이나 언덕의 형태를 종종 뭉게구름처럼 표현하는 운두준법(雲頭皴法), 산이나 언덕의 밑둥에 곁들인 조광효과(照光效果), 나무의 잔가지들을 게의 발톱처럼 표현하는 해조묘법(蟹爪描法), 계절 변화의 섬세한 표현 등이 돋보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다소간을 막론하고 11세기 북송대(北宋代)의 대표적 화원이었던 곽희(郭熙)와 그의 추종자들을 일컬는 곽희파의 화풍, 또는 이 · 곽파(李郭派/李成 · 郭熙派)의 화풍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안견파의 산수화 작품들은 구도와 구성, 공간개념, 토파(土坡)의 표현 등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여준다. 즉 「사시팔경도」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듯이 각 폭의 작품은 한쪽 종반부(縱半部)에 무게가 쏠려 있고 다른 반대쪽 종반부는 가볍게 묘사되어 있어서 편파구도(偏頗構圖)를 이룬다. 무게가 쏠린 쪽의 종반부는 근경(近景)의 언덕과 소나무와 집들이 원경(遠景)의 주산(主山)과 어울려 2단을 이룬다. 이러한 구도를 편파2단구도(偏頗二段構圖)라고 부른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무게가 치우친 종반부에 근경, 중경(中景 ), 원경이 3단을 이루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를 편파3단구도라고 칭한다. 따라서 편파3단구도는 편파2단구도로부터 변화, 또는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편파2단구도이든 편파3단구도이든 무게가 한쪽 종반부에 쏠려 있는 편파적인 구도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런데 2단구도이든 3단구도이든 옆의 다른 쪽 그림과 함께 나란히 펼쳐서 보게 되어 있어서 두 폭의 그림을 함께 보면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게 된다. 오른쪽 폭은 오른쪽에, 왼쪽 폭은 왼쪽에 무게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폭을 함께 보면 중앙 부분은 넓게 확대되거나 확산된 공간을 드러낸다. 이러한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은 낱폭을 떼어서 볼 때에도 엿볼 수 있다. 조선초기 한국인들의 공간개념을 잘 드러낸다. 편파구도 이외에도 대칭구도(對稱構圖)도 활용되었는데 기본적인 화풍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구도와 공간개념 이외에도 구성상의 특징도 완연하다. 즉 안견파화풍의 작품들은 각 폭이 몇 무더기의 경군(景群)들로 짜여져 있으며 시각적 연결성을 드러낸다. 흩어져 있는 경군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유기적인 연결성을 중시하는 중국의 곽희파 그림들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안견파의 그림들에서는 강가 토파(土坡)의 표현방법과 여백을 지극히 중시한 점에서 소극적으로나마 남송대(南宋代) 화원체인 마하파(馬夏派/馬遠 · 夏珪派)의 영향도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안견파의 화풍은 이처럼 북송대 곽희파 화풍을 위주로 하고 남송대 마하파 화풍도 수용하여 절충하면서 한국적 화풍을 창출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전반기에 짧은 선(線)과 점을 구사하여 산과 언덕의 표면에 질감(質感)과 양감(量感)을 부여하는 독특한 한국적 준법(皴法)인 단선점준(短線點皴)이 창출되었던 사실도 안견파화풍의 특징 및 변천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하다.
조선초기 안견에 의해 창출된 안견파화풍은 초기의 석경(石敬), 양팽손(梁彭孫), 신사임당(申師任堂), 중기의 김시(金禔), 이정근(李正根), 이흥효(李興孝),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등의 유명 화가들과 무수한 무명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문인계회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초기의 기록화들과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등의 감상화들이 대부분 한결같이 안견파화풍으로 그려진 것을 보면 안견파화풍은 조선초기의 화단을 지배하였던 화풍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안견파 화풍은 국내에서는 조선초기는 물론 조선중기까지 맹위를 떨쳤고 15세기에는 일본에 전해져 슈분(周文) 일파의 산수화에도 구도와 구성, 공간의 표현에 있어서 심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동아시아의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