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산(安山) 이다.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 취옹(醉翁)이다. 아버지 김중휘(金重輝)와 이경복(李景福)의 딸 전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형은 김선국(金善國)이다. 명성과 달리 일생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고 생년도 정확하지 않다.
1662년(현종 3) 2월, 일본 대마도주가 김명국을 보내달라고 하는 공식 요청에 연로하고 병 든 상태라 한 기록이 있고, 1663년(현종 4) 초여름 강백년(姜栢年, 1603~1681)을 만난 사실이 남아 있어, 최소 166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평소 호방하고 술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남유용(南有容)의 「김명국전」, 정내교(鄭來僑)의 『완암집(浣巖集)』,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聽竹畵史)」 등에 관련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도화서 종6품 교수를 거쳐 정6품 사과(司果)를 지냈고, 각종 궁중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그림 제작에 30여 차례 선발되었다. 1623년(인조 1) 반정공신(反正功臣)에게 정사공신(靖社功臣)을 녹훈했을 때 이들의 화상(畵像)을 제작했다. 1627년(인조 5)의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를 포함하여 총 18회 의궤 제작에 참여했다.
김명국은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통신사 수행 화원에 발탁되어 두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여러 기록을 통해 그에게 그림을 구하려는 일본인이 많았음이 확인된다.
중국 선종의 첫 번째 선조인 보리달마를 많이 그렸다. 달마대사가 갈댓잎을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넌 일화를 그린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에는 김명국이 만년에 사용한 주1이라는 호가 적혀있다.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그린 것으로 알려진 「달마도」에는 활달한 주2가 구사되었다.
유독 선비나 처사가 당나귀를 타고 여행하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험준한 산세, 깎아내린 듯한 위태로운 절벽, 날카롭고 각진 바위, 앙상하게 뒤틀린 나뭇가지 등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김명국 특유의 짙고 거친 필묵법은 눈 덮인 차가운 경관을 연출하기에 적합했다. 이러한 양식에는 중국 명대 절강성 지역에서 확산된 주3의 영향이 발견된다.
1623년(인조 1) 「정사원종공신녹권」과 연관된 화상을 제작했고, 화상이 모두 완성된 1625년(인조 3)에 공신도감의궤 제작에 참여한 화원들과 함께 정사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