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 중국 사행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왕의 피난을 돕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한 일로 논죄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함경도 지역으로 이거(移居)하여 북쪽 지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시(金禔), 노수신(盧守愼), 이산해(李山海), 이원익(李元翼), 이춘영(李春英) 등과 교유했다. 젊은 시절 관동 지역을 유람했으며, 김시를 데리고 금강산 유람을 하고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경윤은 당시 새로 유입된 절파(浙派) 주1을 적극 수용하여 자연 친화적이고 탈속적인 은일 주제의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현전 작품은 산수의 일부분만을 취하고 인물을 부각한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가 주를 이루며, 대경(大景) 산수를 그린 작품도 전한다.
이경윤의 전칭작은 필치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 한 사람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데, 호림박물관 소장 『산수인물첩』 중 최립(崔岦)의 발문이 있는 9점을 기준작으로 보고 있다. 암벽과 바위의 능숙한 묵법, 둥근 얼굴과 눈동자의 섬세한 표정, 활달한 선묘의 옷 주름 등 다른 전칭작에 비해 뛰어난 화격을 보여준다. 산수 외에 소와 말, 개, 화조, 노안(蘆雁) 등을 그린 작품도 전하고 있으며, 후대 문인들의 평가로 볼 때 이들 분야에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작품은 『산수인물첩』, 「주상탄금도(舟上彈琴圖)」, 「송음고일도(松陰高逸圖)」,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산수도」, 「낙파필희첩(駱坡筆戱帖)」, 「기우취적(騎牛吹笛)」 등이다.
조선 중기에 이경윤의 작품을 소장하거나 감상한 인물은 이춘영, 유몽인(柳夢寅), 이수광(李晬光), 이정귀(李廷龜), 노수신, 최립, 황정욱(黃廷彧), 이호민(李好閔), 이준(李埈) 등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당시 이경윤 작품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화풍은 17세기로 이어지며 절파 화풍의 확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