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은 조선시대 형조판서, 병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75년(선조 8)에 태어나 1643년(인조 21)에 사망했다. 도순변사 신립의 아들이다.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 물러나 있다가 능양군을 추대하는 모의를 주도하였다. 1623년 반정 이후 훈련도감·호위청·포도청의 대장을 겸직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이괄의 난 때 훈련대장으로 어가를 호위하였다.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외교 교섭에 능해 청나라의 과도한 요구와 잦은 내정 간섭을 철회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전쟁에 참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태안군수 ·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김류(金瑬) · 이귀(李貴) · 최명길(崔鳴吉) · 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 신경진과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 직후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 · 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곧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 · 호위청(扈衛廳) · 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훈련대장으로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평정 후 역도에 의하여 추대되었던 흥안군(興安君)을 처형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을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빼앗아 이 때문에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인조 13)에는 목릉(穆陵) · 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으로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조판서를 겸하도록 했으나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주었으며, 청나라와의 화의 성립 후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37년(인조 15) 좌의정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는데, 이 때 난 후의 민심수습책을 논하고 수령의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개진하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돌아와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의논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은밀히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그간의 사정을 변명하도록 하였다.
1641년(인조 19) 다시 사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구금되어 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하였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다가 병으로 사퇴한 후 이듬해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무인 가문 출신의 손꼽히는 장재(將材: 장군이 될만한 인물)로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항상 훈련도감 · 호위청 등의 친병(親兵)을 장악했으며 왕의 신변을 책임졌다. 상신(相臣)으로 있으면서 특별히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나, 외교 교섭에 능해 청나라의 과도한 징색(徵索)과 잦은 내정 간섭을 철회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 · 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 · 이귀 · 김자점(金自點) · 심기원(沈器遠)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 장려하여 등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을 믿고 탐오한 면도 있어 식자층의 비난을 받았다. 무인이면서도 김류 · 이귀 · 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김류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은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의 종사관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년(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문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