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인조반정에 공이 있었던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의 훈신들이 숙위(宿衛)가 소홀하다고 하여, 반정 직후인 9월에 설치해 10월에 군영의 체제를 갖추었다.
표면적인 설치의 이유는 왕권호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공신들이 모집해 거사에 이용했던 군사들로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정공신 주축의 군사적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면에서는 왕권 견제의 구실을 하였다.
설치 당시는 ‘호위4청’이라 하여 반정에 공로가 가장 많았던 이서(李曙)·김류·이귀·신경진(申景禛) 등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각각 100명의 군관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밖에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은 당상관이라 하여 각 50명의 군관을 거느리게 했다. 그 수는 모두 500명으로, 국가에서 급료를 지불하였다.
이와 같은 호위청의 편제는 현종 때 호위3청으로 개편되었다. 대장은 대개 시·원임대신 및 국구(國舅) 중에서 겸하고, 실제 군사 지휘권자로 별장 3명을 두었다.
각 청에는 군관 350명씩을 편제하여 이른바 최고 관료층의 군사기반화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1778년(정조 2) 정조가 왕권 호위기관으로 숙위소(宿衛所) 등을 설치하면서 호위1청으로 축소하였다.
군관도 350명으로 한정하여 과거 왕권 견제 구실을 하던 것을 명실상부한 왕권 호위의 친위 체제로 변혁시켰다. 군사는 대궐 내의 입직은 물론 국왕의 교외행행(郊外行幸) 및 도성 안 동가(動駕) 등의 배위(陪衛)를 담당하였다.
1881년(고종 18) 일단 폐지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설치되는 등 개편을 거듭하다가, 1894년의 군제개편으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