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裕), 호는 설탄(雪灘). 화원으로 통정을 지낸 한선국(韓善國)의 아들이며, 사과(司果)를 지낸 한시진(韓時振)의 형이고, 화원 이명욱(李明郁)의 장인이다. 그 역시 화원 출신으로 도화서(圖畵署)의 교수를 지냈다.
화원 가문 출신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드물지만 도화서 화원으로서 국가적 사업에 다수 참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51년(효종 2) 김명국(金明國) 등 여러 화원과 함께 현종명성후(顯宗明聖后) 가례반차도(嘉禮班次圖) 제작에 참여하였다. 1664년함경도에서 시행된 문무과 별시를 기록한 「북새선은도」와 시험관들의 유람과 시문을 기록한 『북관수창록(北關詶唱錄)』의 실경산수화를 제작하였다. 1655년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사행 중 묵죽(墨竹)을 비롯하여 종사관 남용익(南龍翼)의 기행시화첩인 『부상시화첩(扶桑詩畵帖)』을 위하여 그 곳의 실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화비고(古畵備考)』에는 그의 묵죽화 두 점이 수록되어 있다.
1681년 북경사행에 수행화원으로 참가하였다. 1682년(숙종 8)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초상을 그렸는데, 현존하는 작품은 모사본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는 인물화 및 계화(界畵), 산수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도일화원(渡日畵員)이었던 김명국과 마찬가지로 17세기 화단에 감필법(減筆法)으로 처리된 선종화(禪宗畵)를 남기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남긴 「포대도(布袋圖)」 등의 선종화는 그 당시 일본에서 풍미하던 것으로 그의 도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밖에 함경도에서 특별히 실시되었던 문무양시의 장면을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는 인물과 건물의 묘사가 정확하고 활달하여 그의 사실적인 표현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