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호군(護軍)을 지냈다. 1468년(세조 14)금강산에 파견되어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바쳤고, 1471년(성종 2)『세조실록』 수찬(修撰)에 참여한 공으로 한 직급 승급되었다.
1472년에는 도화서별제(圖畵署別提)인 최경(崔涇)·안귀생(安貴生)과 함께 소헌왕후(昭憲王后)·세조·예종의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직급이 다시 올랐다. 1476년에는 최경·안귀생 등과 함께 세조어진을 모화(模畵)하였다.
특히, 그가 1477년 정월과 11월에 예조를 통하여 화원의 처우문제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있어 이때에는 화원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던 것 같다.
당시 선비화가인 강희안(姜希顔)·희맹(希孟) 형제와 서거정(徐居正) 등과도 교분이 있었던 듯한데, 강희안은 그의 작품에 아취가 있다고 평한 바 있고 서거정은 그가 호랑이그림에 능숙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강희맹이 그린 송죽(松竹) 두폭에 배련이 매화를 추가시켜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로 완성하였다 한다. 전하는 기록이나 찬문(讚文) 등으로 보아 산수·인물·초상에 능하였던 화가로 추정되지만 전하는 유작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