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우 ()

화접도 / 남계우
화접도 / 남계우
회화
인물
조선 후기, 화접도를 주로 그린 화가.
이칭
초명
영시(永詩)
일소(逸少)
일호(一濠), 일호산인(一濠散人), 일호소불(一濠小弗)
별명
남나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1년(순조 11)
사망 연도
1890년(고종 27)
본관
의령(宜寧)
출생지
한양
주요 관직
돈녕부 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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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남계우는 조선 후기 화접도를 주로 그린 화가이다. 나비에 심취하여 '남나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꽃과 나비 그림을 많이 그렸다. 철저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로 각 종의 특징과 생태를 정확하게 재현한 군접도 형식을 다작했다. 소론, 남인 출신의 백과사전적 저술 태도와 박물학적 학문 경향이 엿보인다.

정의
조선 후기, 화접도를 주로 그린 화가.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초명은 영시(永詩)이며, 자는 일소(逸少), 호는 일호(一濠) · 일호산인(一濠散人) · 일호소불(一濠小弗)이다. 숙종 대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영수 남구만(南九萬)이 5대조이며, 아버지는 남진화(南進和), 어머니는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다.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1811년(순조 11) 한양에서 태어났다.

주요 활동

56세 때인 1866년(고종 3) 처음으로 종9품의 감역(監役) 벼슬을 음직으로 받았다. 같은 해 병인양요로 인해 지금의 서울시 중구 소공동 일대인 남송현(南松峴)에서 잠시 살았다. 이후 71세 때인 1882년(고종 20)에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 품계를 받고 돈녕부 도정(都政)을 지냈다. 1890년(고종 27)에 경기도 용인군 화곡(花谷)에서 사망했다.

현전하는 작품은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로 나뉘는데, 대부분 꽃과 나비를 그린 화접도이다. 평소 나비와 꽃을 많이 그려 '남나비[南蝶]'라는 별명이 있었다. 초기 화접도는 심사정, 김홍도, 이교익, 신명연의 나비 그림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점차 철저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로 각 종의 특징과 생태를 정확하게 재현한 군접도 형식을 다작하기 주1

또한 나비와 식물을 함께 그려 정확한 계절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창작 방식에는 소론, 남인 출신의 백과사전적 저술 태도와 박물학적 학문 경향이 엿보인다. 중국 고대 박물에 대한 저서들을 찾아 시구를 발췌해서 자신이 그린 화접도에 제발(題跋)로 남겼다.

참고문헌

원전

『전원팔영(田園八詠)』

단행본

『한국역대서화가사전 상』(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논문

윤종균, 「일호 남계우(一濠 南啓宇)의 나비 그림에 대한 일고찰」(『동원학술논문집』 15,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4)
김영애, 「남계우(1811-1890)의 회화관과 호접도」(고려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9)
이소연, 「일호 남계우(1811-1890) 호접도의 연구」(『미술사학연구』 242·243, 한국미술사학회, 2004)
주석
주1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생물학 교수였던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은 3편의 논문을 통해 남계우 그림에 보이는 나비 종류를 분석하여 당시 서울 근교에 자생한 나비 37종을 밝힘과 동시에, 남계우가 나비와 나방의 생태 및 각 종의 특징을 완전히 파악했음을 언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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