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초명은 영시(永詩)이며, 자는 일소(逸少), 호는 일호(一濠) · 일호산인(一濠散人) · 일호소불(一濠小弗)이다. 숙종 대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영수 남구만(南九萬)이 5대조이며, 아버지는 남진화(南進和), 어머니는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다.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1811년(순조 11) 한양에서 태어났다.
56세 때인 1866년(고종 3) 처음으로 종9품의 감역(監役) 벼슬을 음직으로 받았다. 같은 해 병인양요로 인해 지금의 서울시 중구 소공동 일대인 남송현(南松峴)에서 잠시 살았다. 이후 71세 때인 1882년(고종 20)에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 품계를 받고 돈녕부 도정(都政)을 지냈다. 1890년(고종 27)에 경기도 용인군 화곡(花谷)에서 사망했다.
현전하는 작품은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로 나뉘는데, 대부분 꽃과 나비를 그린 화접도이다. 평소 나비와 꽃을 많이 그려 '남나비[南蝶]'라는 별명이 있었다. 초기 화접도는 심사정, 김홍도, 이교익, 신명연의 나비 그림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점차 철저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로 각 종의 특징과 생태를 정확하게 재현한 군접도 형식을 다작하기 주1
또한 나비와 식물을 함께 그려 정확한 계절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창작 방식에는 소론, 남인 출신의 백과사전적 저술 태도와 박물학적 학문 경향이 엿보인다. 중국 고대 박물에 대한 저서들을 찾아 시구를 발췌해서 자신이 그린 화접도에 제발(題跋)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