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사 ()

조선시대사
단체
1847년 봄 서울 유최진의 자택에서 결성되어 1870년대까지 존속한 여항문인의 아회 집단.
정의
1847년 봄 서울 유최진의 자택에서 결성되어 1870년대까지 존속한 여항문인의 아회 집단.
개설

벽오사(碧梧社)는 1847년(헌종 13) 봄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1870년대까지 존속한 여항문인(閭巷文人)의 아회(雅會) 집단이다. 구성원은 30여 명이며, 핵심 인물은 이기복(李基福, 1783-1863), 조희룡(趙熙龍, 1780~1866), 정지윤(鄭芝潤, 1808~1858), 전기(田琦, 1825~1854), 유재소(劉在韶, 1839~1911), 유숙(劉淑, 1827~1873), 오창렬(吳昌烈), 나기(羅岐), 유학영(柳學永), 유상(柳湘) 등이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영위했던 벽오사 동인들은 사대부와도 두루 사귀었고 이상적인 문인 모임인 난정수계(蘭亭修契)나 오로회(五老會) 등을 모방하면서 옛 선비의 풍류 의식을 추구했다.

벽오사의 활동을 알 수 있는 문집으로는 유최진의 『초산잡저(樵山雜著)』, 조희룡의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이기복의 『석경학인신유초(石經學人神遊草)』, 나기의 『벽오당유고(碧梧堂遺稿)』 등이 있다.

설립 목적

유최진은 여항문인들이 우정과 신의를 바탕으로 시와 글씨를 논하고, 문학·예술을 매개로 한 사귐을 통해 옛 선비의 결사를 따르고자 벽오사를 설립했다.

연원 및 변천

벽오사의 맹주인 유최진은 본관이 진주(晋州)이고, 자가 미재(美哉), 호가 학산목재(學山木齋), 산초(山樵) 등이며, 대대로 의업을 세습한 집안에서 부유하게 성장했다. 40대에 세상과 단절한 채 축척된 부를 누리며 여행을 다니거나 서화·고동(古董: 골동. 오래되었거나 희귀한 옛날의 가구나 예술품)을 모으고 감상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여항문인을 모아 벽오사를 결성했다. 벽오사라는 이름은 시냇가에 위치한 유최진 저택의 우물가에 늙은 벽오동이 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벽오사의 동인들은 단오, 중양, 상원 등의 절기에 정기적으로 모이거나, 소동파를 숭상하여 해마다 소동파의 생일을 기념하여 모임을 개최했고, 그 이외에도 가끔씩 회합을 열어 시서화(詩書畵)를 창작했다. 예컨대 1847년 비오는 입추에 함께 시를 지어 「추우고(秋雨稿)」를 엮었고, 1855년 음력 5월 5일 서원 송단에서 중오회(重五會)를, 1856년에는 강매결사(絳梅結社)를 열었다. 벽오사 모임 중에 가장 큰 사건은 왕희지의 난정수계가 있은 지 1500년이 되는 해와 1793년 만들어진 ‘옥계사(玉溪社)’의 6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53년 봄에 성대하게 개최된 아회이다. 이 모임에는 벽오사 동인뿐만 아니라 비연시사(斐然詩社), 육교시사(六橋詩社)의 구성원까지 참석했다. 김석준(金奭準, 1831~?)을 비롯한 30여 명의 문인은 남산 노인정에서 시회를 열었고, 다시 최필문(崔必聞)의 산장으로 자리를 옮겨 모임을 지속하였다. 이 모임을 유숙이 '수계도(修稧圖)'라는 그림으로 기록했다. 또한 1861년 정월 대보름에는 유최진의 집에서 조희룡, 이팔원, 김익용, 이기복 등이 모여 벽오사의 소모임인 오로회를 열기도 했다. 벽오사는 맹주인 유최진이 세상을 떠나면서 서서히 종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능과 역할

여항문인은 축적된 경제력을 토대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학문과 예술을 함양하기 위해 시사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유최진을 비롯한 벽오사 동인 역시 옛 문사의 멋스런 모임을 모방하며 시서화를 창작하는 등,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대상의 자세한 묘사보다 사물이 지닌 함의를 간결하게 표현한 문인화를 선호했다. 즉 시서화 일치를 통한 사의성(寫意性)의 완성을 예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한시 창작과 남종화 제작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형상을 세밀히 그리는 것을 ‘속기(俗氣)’라고 간주한 것이다. 이렇듯 벽오사 동인의 시서화는 19세기 문인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시각물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벽오사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여항문인의 시사이므로 그들의 창작물은 조선 말기 문인 문화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의 여항문인들이 그러했듯, 벽오사의 동인도 시사 활동을 사(士)나 소유(小儒)로 편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시사에서 새로운 창작을 실험하기보다 사대부 문인의 시서화를 답습했고 그 결과물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혹은 자아 만족의 소유물로 삼는 데 그쳤다. 이러한 점이 벽오사 창작물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여항문인의 집단과 달리 모임 장면을 그림으로 기록한 아회도를 남긴 것은 특이할 만한 사항이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아회도』(송희경, 다할미디어, 2008)
『조선시대 회화사론』(홍선표, 문예출판사, 1999)
「19세기 벽오사 회화 연구」(손정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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