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사군자(四君子)나 산수(山水)와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빌어 의(意)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사의(寫意)라는 개념이 중국회화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북송 이후 문인화가 크게 발달되는 것과 때를 같이한다. 그러나 이미 당대(唐代)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입의(立意)에 근본을 두고 붓을 움직여야 한다고 하여 화가의 뜻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문인들은 기본적으로 서예의 필법에 숙련된 사람들이고 그림은 서예의 연장선상에서 그리는 것이므로 필획 하나하나에 그리는 사람의 뜻과 인격이 표출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형사(形似), 즉 그리는 대상과 닮게 그리면서 화가의 뜻을 표출하여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소식(蘇軾)의 절친한 친구이자 북송 제일의 묵죽화가 문동(文同)의 묵죽화는 그 좋은 예이다. 대나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잘 포착하면서도 고아(古雅)한 화가의 인품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 받으며 사의(寫意)에 성공한 대표적 그림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원대(元代)로 내려가며 형사(形似)를 이루지 않은 채 사의(寫意)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즉 예찬(倪瓚)은 자신의 묵죽에 제(題)하기를 이 묵죽화가 대나무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은 변명하지 않을 것이며 이 그림은 자신의 흉중(胸中)의 일기(逸氣)를 표출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이로서 형사와 사의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명대부터는 사의(寫意)라는 단어가 하나의 회화 양식처럼 인식되면서 수묵화에서 간단한 필치로 생략적으로 그린 그림을 사의화(寫意畵)라고 부르게 되었다. 몰골법(沒骨法), 즉 윤곽선 없이 먹으로 형태를 표현한 화훼(花卉) 그림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 경우가 많으며, 서위(徐渭), 주답(朱耷), 운수평(惲壽平) 등이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현대에는 사의화와 문인화(文人畵)를 동일시하는 현상이 생겼는데 이는 문인화의 참뜻, 즉 그 발달과정이나 이론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난 오류에서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