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 놓였던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병풍이다. 오봉병·일월오봉병·일월오악도·일월곤륜도라고도 한다. 도상의 연원은 『시경』의 「천보」 시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독특한 형태로 발달하여 국왕의 존재를 상징하는 궁중회화로 자리잡았다. 각 궁궐의 정전 어좌 뒤에 놓인 대형 병풍이나 국왕이 참석한 각종 행사도 중에 국왕이 않는 자리에서 화중화의 형식으로 찾아볼 수 있다. 빈전이나 혼전, 어진을 봉안하던 선원전 등에 오봉병을 배치했고, 왕급으로 존숭되었던 관왕묘에서도 사용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뒷편에 놓였던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병풍. 오봉병·일월오봉병·일월오악도·일월곤륜도.
개설
특징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이전의 것으로 현재의 오봉병과 같은 주제를 그린 그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남송(南宋)의 마화지(馬和之, 12세기 초 활동)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을 여러 장 그렸는데 이 가운데 「천보(天保)」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산수화의 형태를 취한 이 그림은 산의 양쪽에 해와 달을 각각 그려 넣고 제목을 ‘천보’라고 적어 넣기는 하였지만 위에서 살펴본 천보시의 모든 요소를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천보(天保)」보다 더 형식화된 형태는 1605년 초간(初刊)된 『정씨묵원(程氏墨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먹[墨]의 표면에 찍는 도안을 목판화로 그린 것이다. 『정씨묵원』에 적힌 제목은 「천보구여(天保九如)」이다. 이 판화 그림에서는 산봉우리들이 조선시대의 오봉병에서와 같이 완전히 형식화되지 않았고, 가운데 봉우리의 왼쪽에 있는 달은 오봉병에 보이는 보름달이 아니라 반달이다. 실제로 시에 표현된 “차오르는 달”을 보다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 역시 우리나라 오봉병의 것들처럼 화면의 양쪽 끝으로 각각 갈라져 두 개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지 않고 보다 자연스러운 나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마화지(馬和之)의 산수화적인 표현과 매우 형식화된 조선의 오봉병의 중간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오봉병들은 기년작이 드물지만 최근 1883년 북관왕묘 건립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4첩병풍과 1857년에 해당하는 ‘함풍7년(咸豐七年)’ 기록이 있는 6첩병풍이 공개되어 앞으로 양식변천을 연구할 자료가 생겼다. 한편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 뒤에 있었던 4첩 병풍이 그 구도(構圖)로 보아 다른 병풍과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우선 4폭의 크기가 모두 같지 않다. 가운데 두 폭은 247×86cm이고, 양쪽 가의 두 폭은 247×78cm로서 전체 크기는 247×333cm이다. 물결무늬로 가득한 물과 흰 포말부분이 병풍의 전체 높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점이 다른 오봉병과 다른 점이다. 이 병풍에서 오봉과 일월이 마치 바다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두 폭포가 구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오봉병은 『정씨묵원』의 「천보구여」장면을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모든 요소들이 훨씬 형식화되어 배치되어 있다. 경기전의 오봉병은 임진왜란 후 파괴되었던 경기전을 1614년 새로 복원하여 어진을 봉안하였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의 오봉병에 관하여는 당가(唐家) 안 북벽에 오봉을 그리고 동서 벽에는 여록(餘麓)을 그리고 일월경(日月鏡)을 주벽에 철사로 걸어놓는다는 기록이 1674년 『현종대왕 빈전도감의궤』에 보인다. 1758년의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도설(圖說)에는 당가의 그림은 있으나 오봉병의 그림은 없고 일월경을 걸되 새로 만들어야 할 경우 금니(金泥)와 은니(銀泥)로 칠하라는 말이 있어 원래는 모종의 금속으로 만들어 쓰던 것을 영조(英祖)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비용절감 차원에서 새로운 규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선조 23년(1590)에 문정전(文政殿)에 도둑이 들어 어좌 일월경과 문장(門帳)을 도둑맞아 피의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어 어좌에도 일월경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봉병과 일월경의 관계는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황
그리고 근래 조사된 동묘, 북묘 등 관왕묘에 배치된 오봉병들은 이들이 국왕 이외에도 왕급으로 존숭되었던 관왕묘에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어진관련 의궤와 미술사』(이성미, 소와당, 2011)
- 『중국 한국미술사』(김홍남, 학고재, 2009)
- 『동양화 읽는 법』(조용진, 집문당, 1989)
- 「덕수궁 중화전 당가 구조와 오봉병의 원형에 대한 고찰」(전나나, 『미술사학』,39, 2020)
- 「조선시대 흉례도감의궤에 나타난 오봉병 연구」(명세나, 『미술사논단』,28, 2009)
- 「조선왕실 흉례의 의장용 병풍의 기능과 의미」(신한나,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문 2008)
- 「조선시대 오봉병 연구 - 흉례도감의궤 기록을 중심으로-」(명세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7)
- “The Screen of the Five Peaks of the Chosŏn Dynasty”(Yi Sŏng-mi, Oriental Art, vol. XLII, no. 4, 1996/97)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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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중국 남송 초기의 화가(?~?). 산수화ㆍ인물화에 능하였으며, 북종화에 속하면서 남종화의 기법을 도입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세웠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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