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사조’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동진(東晋)의 인물화가 고개지(顧愷之)이다. 그는 현재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포함되어 전하는 세 편의 글, 즉 「논화(論畵)」, 「위진승류화찬(魏晉勝流畵贊)」, 그리고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에서 자신의 인물화에 관한 이론을 펼쳤다. 이 가운데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는 도교(道敎)의 신선들이 사는 산의 형태와 신선들의 위치를 정해주는 문자로 이루어진 설계도이다. 그는 전신과 유사한 의미로 ‘신사(神似)’, 즉 ‘정신이 닮음’이라는 말로 초상화에서 그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세계를 제대로 표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전신(傳神)이나 신사(神似)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관하여 고개지는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체를 제대로 묘사함으로써 정신을 표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물의 얼굴, 그 중에서도 그는 눈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사지가 잘 생기고 못생긴 것은 본래 묘처(妙處)와 무관하나, 정신을 전하여 인물을 그리는 것은 바로 아도(阿堵)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아도’란 당시의 방언으로 ‘이것’이라는 뜻이며 이 맥락에서는 눈동자를 가리킨다. 그는 또 “눈동자를 그릴 때 아래 위나 크고 작음, 또는 짙고 엷음을 터럭만큼이라도 잃으면 신기(神氣)가 이와 함께 모두 변하고 만다.”고 하였다.
고개지는 또한 특정 인물의 정신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그 인물화의 특수한 배경을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동시대의 유명한 시인 사곤(謝鯤)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를 언덕과 계곡사이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 그 한 예이다. 사곤이 평소에 “관복을 입고 조정에 나가 백관의 모범이 되는 데는 유량(庾亮)을 따를 수 없으나 속세를 떠나 언덕과 계곡에서 은일(隱逸)하는 것은 내가 그보다 낫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현재 원나라 문인화가 조맹부(趙孟頫)가 고개지의 작품을 기초하여 그렸다는 「사유여구학도권 (謝幼輿丘壑圖卷)」(미국 프린스턴대학교박물관 소장)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북송대의 화론에서도 여전히 신사(神似)는 가장 중요한 회화비평 기준으로 자리매김되었으며 문인화 이론이 발달되면서 형사(形似)를 중요시 하지 않는 듯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들이 있었기는 하지만 ‘이형사신’의 근간(根幹)은 그대로 유지되어갔다. 즉 전신(傳神)은 형사(形似)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