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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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조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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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개념
사람의 용모 · 용태를 그리는 회화. 영정 · 진영.
이칭
이칭
영정,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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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의 용모 · 용태를 그리는 회화. 영정 · 진영.
내용

인물화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초상화라는 용어 자체는 근래에 성어된 용어이다.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인(先人)들의 문헌 기록이나 찬문을 훑어보면 초상화를 일컬어 진(眞)·영(影)·상(像)·초(肖)·진영(眞影)·영자(影子)·사진(寫眞)·전신(傳神)·영상(影像)·화상(畫像)·영정(影幀)·영첩자(影帖子) 등 다양하게 지칭하여 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초상화가 어느 시기에 처음 그려졌는가 하는 문제는 기록상으로 정확히 추단하기 어렵다. 또한 현재의 자료로서는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으로도 소급해 보기 어렵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초상화에 관련된 기록 및 작품이 나타난다.

백제의 아사태자(阿佐太子)가 그렸다는 일본 쇼토쿠태자상(聖德太子像)이나 ≪당서 唐書≫에 보이는 ‘畫王國形(화왕국형)’의 기록 및 안악3호분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일련의 총주부부상(塚主夫婦像)이 그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초상화는 엄밀히 말한다면 유형적 인물화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특정한 개성을 구현하고자 한 작화(作畫)는 아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채서(典彩署:彩典)라고 하는, 화(畫)를 보다 본격적·전문적으로 관장하였던 기관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기관의 소속인들이 관장한 업무 중에 왕상(王像)이나 공신상 등 초상화의 제작이 있었는지는 현재 상고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진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궁예조(弓裔條)에 보이는 ‘浮石寺新羅王像’이나 박사해(朴師海)의 ≪창암집 蒼巖集≫에 보이는 ‘原州 敬順王影殿重修記’에 의하여 왕의 진영 제작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 승상(僧像)의 제작 역시 활발하였음은 현재 쌍계사진감선사비명(雙磎寺眞鑑禪師碑銘)을 비롯한 각종 비문 및 ≪조당집 祖堂集≫에 전래되는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진(眞)에 대한 시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일반 사대부상으로는 당대 필명을 자랑하던 최치원(崔致遠)의 상이 비록 이모본이나마 도처에 봉안되어 오고 있다.

이처럼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초상화는 문헌 기록이나 현존 작품 양면에서 볼 때 모두 지극히 빈약하다. 이에 비하여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왕 및 왕후의 진영의 영전(影殿) 봉안 기록이 누차 보여서 그 제작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개국(開國)·위사(衛社)·정난(靖難)·익대(翼戴)·척경(拓境)·탕구(蕩寇) 등 기타 여러 사유에 의하여 이른바 벽상공신(壁上功臣)·도형공신(圖形功臣)이라는 칭호 밑에 각종 공신도상이 그려졌다.

이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상의 제작도 활발하였음은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을 비롯한 각종 문집에 수록된 제기 및 찬문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초상화의 감상 기준은 상당하였다. 그래서 초상화는 사형(寫形)만이 아니라 사심(寫心), 즉 마음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전신(傳神)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회화사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작품에 이르면 현전본(現傳本)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단지 수 폭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초상화의 전반적인 양식적 변천이나 시대적 특징을 들추어내기는 불충분하다.

다만 고려 말기의 삼은(三隱) 영정이나 고흥군성산사(星山祠)에 전해 오는 이장경(李長庚)·이조년(李兆年)·이숭인(李崇仁) 등 명문 이씨가(李氏家)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상용 형식(像容形式)이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철상이나 이소상(泥塑像) 등 재료도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의 초상화는 숭불 사상의 영향으로 왕 및 왕비의 진영을 비롯하여 공신도상, 나아가서는 일반 사대부상들마저도 각종 사찰에 봉안되어 그 천복을 기구하여 왔다. 이러한 점은 조선 초기까지도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 주목된다.

초상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시되는 시기는 조선시대로, 조선시대는 국초부터 유교를 실천적 지도 이념으로 표방하였다. 그리고 보본 사상(報本思想)에 근거를 둔 가묘(家廟) 및 영당(影堂)의 설립을 국책적으로 권장하였다.

나아가 중기 이후부터는 각종 서원(書院) 및 일반 사우(祠宇)가 속속 건립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그러한 장소에 봉안될 초상화의 수요를 자극하였다. 따라서 활발한 초상화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를 담당하는 초상화사(肖像畫師)들의 기량 또한 높아갔고 이를 보는 관상자(觀賞者)의 감상안(鑑賞眼) 또한 고양되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신분에 따라 대략 여섯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어진, 즉 왕의 초상화이다. 어진 제작은 원래 왕가의 자손이 그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도상 작업으로서 이미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계속 행하여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상징적 의미가 강조되어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진전 봉안을 통하여 국가적 결속을 다지고 조종(祖宗)이 영구히 뻗어나갈 것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따라서 태조에서부터 고종·순종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도사 및 모사가 면면히 행하여져 왔다.

둘째는 공신상이다. 공신도형은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공신호(功臣號)가 책록되고 곧 입각도형(立閣圖形)의 명에 따라 행해졌다. 공신도형은 당해 공신 및 자손들에게는 치하와 함께 보상하고 여타 신민(臣民)들에게는 귀감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군주 국가에서는 필수적인 도상 작업의 하나로 행하여져 왔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무려 28종에 달하는 공신 책록이 있었으며 거의 대부분 입각도형명이 뒤따랐다. 현재 전해 오는 조선시대의 공신상은 수십 폭에 달한다. 상용 형식면에서는 정장관복(正裝官服)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엄격한 테두리 내에서 작업하였다. 그러므로 경화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왕명에 의하여 당시 초상화로 이름 있는 화사가 그렸으므로 질적 수준 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견지하고 있다. 게다가 공신도상은 대개 제작 연대가 확실하기 때문에 초상화의 전체적인 양식 규명에 기준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이런 공신도상과 함께 작화 계기에 있어 개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유형으로서 기로도상(耆老圖像)이 있다. 조선시대의 기로도상은 대부분이 화첩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유형은 조선시대의 형식적인 최고 관부라 할 기로소 입사(入社)를 기념한 도상이다.

기(耆 : 60세)·노(老 : 70세)라 함은 단순히 나이 많은 늙은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귀·덕을 함께 소유한 노인들의 입사이기 때문에 치하와 함께 명예를 기리는 의미에서 작화된 것이다. 그러나 작품으로서는 거의 졸업 앨범 같은 도화여서 각별한 개성이 구현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네번째는 일반 사대부상이다. 이 유형의 작화 동인(作畫動因)은 다양하다. 하지만 주로 조선시대 사회 전체가 유교적 양반 사회로서 숭현 사상(崇賢思想)이 팽배하였던 만큼 일반 사우나 서원에 봉안한 작품들이다. 이 유형은 야복본(野服本)과 정장관복본(正裝官服本) 양자로 나누어진다. 야복본은 복건이나 동파관판(東坡冠判 : 중국 宋代 문인 소식이 만든 관)에 심의(深衣) 차림의 형식이다. 정장관복본은 공신도상류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일반사대부상은 제작 기간이나 분위기상 제약이 적었던 탓인지 그 중에는 가작(佳作)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화사의 자질면에서는 수준이 고르지 못하여 작품의 질적인 기복이 심하게 나타나 있다.

다섯째는 승상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 사상이 주도하였기에 승상 제작은 전대(前代)에 비하여 뒤져 있다. 그러나 각종 조사상(祖師像)은 계속 그려져 사찰 내의 조사당이나 국사당(國師堂)에 봉안되어 왔다. 승상은 지물(指物)·취세(取勢) 등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일관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분향 예배로 인하여 화폭에 가채나 이모가 거듭되어 원본을 찾기가 어렵다.

여섯째는 여인상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후비의 진영 제작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중기 이후로는 유교적 통념의 가일층 경화로 인한 탓인지 여인상의 제작이 귀해져서 고려시대의 지속적인 후비 진영 제작과 대조된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이들 여러 유형의 초상화는 서로간에 시대적 추이에 따라 공통된 양식상의 변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 특징을 표현 기법 면에서 살펴보면 전기(1392∼1550년)·중기(1550∼1700년)·후기(1700∼1910년) 등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라 함은 태조 연간에서부터 중종 연간에 이르는 동안을 이른다. 이 시기에는 많은 어진을 비롯하여 공신상이 제작되어 왔다. 각종 사묘 및 영당에도 사대부 화상들을 봉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전해 오는 이 시기의 작품은 수 폭에 불과하며, 그것도 대부분이 이모본이다.

이 시기의 화법은 현재 장말손(張末孫)·오자치(吳自治)·손소창(孫昭唱) 등의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이나 김시습상(金時習像)에서 보듯이 안면을 옅은 토황빛 살색을 주조로 시채한 연후에 안면의 구성 요소, 즉 이목구비를 발췌하듯 안색보다 조금 짙은 살빛 구륵세선(鉤勒細線)으로 그려 나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전기 화법의 주도적 기능은 선(線)이었다. 옷주름 처리 역시 외곽 및 주름을 상징적인 몇 개의 선으로 요약하여 그어 나갔다. 화폭은 전체적으로 생신하고 간결한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중기는 중종 연간에서 숙종 연간에 이르는 시기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가장 다사다난한 시기로서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반정(反正)이 계속되는 불안한 시기였다. 이러한 정세는 수많은 공신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걸출한 유학자들이 나타나 난세에 절실히 요구되는 청절과 신념을 표방하였다.

중기의 어진은 전해 오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공신도상의 경우 채연(彩筵)을 깔고 좌안7분면의 자세로 앉아 있는 전형적인 상용 형식이 대두된다. 또한 일반 사대부상 역시 만만치 않아서 심의에 복건이나 동파관 차림의 유학자 풍모를 과시하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이 시기의 화법은 이항복상(李恒福像)·이덕형상(李德馨像)에서 보듯이 안면은 옅은 담홍색의 살빛을 주조로 하고 전기의 선 위주의 화법을 이어 나가면서 그 위에 새로운 표현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즉, 안면이 지닌 고심세(高深勢 : 높고 낮은 형세)를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이것은 동양 전래의 오악 사고(五岳思考)에 기조를 두고 있어 주목된다. 오악이란 안모(顔貌)의 골상(骨相) 중 높은 부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중기 초상화에서는 이러한 오악의 중심 부위, 즉 골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액골(額骨)의 윗부분, 관골 부위(顴骨部位) 그리고 하부골(下部骨)에 붉은 기운을 약간 삽입함으로써 안모의 높낮이를 지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중기 초상화에는 옷주름 처리에서는 선염기(渲染氣)가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선이 주도적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후기는 숙종조 후반에서 조선 말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어진 제작과 함께 숭현 사상의 팽배로 인하여 일반 사대부상의 제작이 활발히 진행된다. 그래서 웬만한 품계의 고관이면 초상화 한두 폭쯤은 남기고 있다. 이에 반하여 비록 당쟁은 치열하였으나 전란이 없는 조정의 표면적인 평온으로 공신도상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후기에 제작된 초상화를 보면 가히 조선시대의 초상화법을 양분한다고 생각될 만한 새로운 화법이 구사되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운염법(暈染法)의 사용이다. 운염법이란 중국의 명나라 말 증경(曾鯨)이라는 화가에 의하여 창시된 화법으로서 우리 나라에 유입된 것이 어느 시기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략 18세기 초엽에는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면 이미 상당한 도식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화법은 초기 수용을 보여 주는 약포영정(藥圃影幀) 남구만상(南九萬像, 보물 제487호)에서 보듯이 안면을 하나의 커다란 마당으로 보고 안면의 움푹한 부분에 붓질을 거듭함으로써 어두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이 덜 가게 함으로써 밝은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안면의 주조색은 초중기에 비하여 짙은 갈색계가 되고 역시 안면의 고심세가 나타나게 된다.

이 후기의 화법은 중기 화법이 높은 부위에 밝은 홍기(紅氣)를 준 것과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에다 짙은 적갈색 기운을 주어 움푹한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 배후에 있는 기본적 사고, 즉 안면의 고심세 표현의 시도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후기 화법 또한 동양 전래의 골상법(骨相法)에 의거하고 있으니 안면의 움푹한 부분이란 골과 골의 연접 부위를 말한다.

후기 초상화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골 자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 위에 피부의 육리문(肉理文) 자체에 대한 관심이 가하여져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피부에는 보편적 결이 있는데 후기 화법에서는 이 결의 방향을 따라 붓질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결국, 후기 초상화법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사고란 곧 인간의 보편적 안면 구조 및 육리문에 대한 해독(解讀) 위에서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을 성형화(成形化)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표현 기법상의 특징은 때로는 도식화되고 때로는 간화(簡化) 내지 심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 말기까지 그 기본적 사고, 즉 골상을 덮고 있는 피부의 육리문 및 그 밑의 내적 뼈대를 화폭에 전사(傳寫)하고자 하는 노력은 줄곧 도상법(圖像法)의 근간이 되고 있다.

고래로 초상화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닮지 않으면 곧 타인이라는 취지하에 대상 인물과 가장 흡사하게 그리기 위하여 초상화사들은 화력(畫力)을 기울였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경우에도 사형(寫形)을 넘어 사심(寫心)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엄격한 감식안이 작용하여 왔다. 그리하여 어진에서도 칠분모(七分貌)면 족하다 하였으니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면에서의 성취도란 자못 수준이 높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수차의 전란으로 많은 수의 초상화가 산일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각도, 각지의 서원·사우 및 영당에는 후손 및 유림에 의하여 선조 및 명현에 대한 추숭의 염(念)으로서 봉안, 향사되어 오고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
「한국초상예술사개관」(최순우·맹인재, 『한국명인초상대감』, 탐구당, 1972)
「조선왕조시대의 초상화연구」(조선미, 홍익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1)
「조선왕조시대의 공신도상에 관하여」(조선미, 『고고미술』 151,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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