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일치(詩畵一致), 즉 시와 그림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추앙받는 당대(唐代)의 시인이자 문인화가인 왕유(王維)의 시에 관하여 소식(蘇軾)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힐〔摩詰: 왕유〕의 시를 음미하면 그 가운데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가운데 시가 있다.” 이 말은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라는 구절로 중국화론에서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곽희(郭熙)의 가르침을 찬술해 놓은 곽사(郭思)의 『임천고치(林泉高致)』(1070년경)에는 “시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상이 있는 시”라고 하였다. 즉 유성화(有聲畵), 무성시(無聲詩) 역시 소식의 위 구절과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송대(宋代) 이후의 중국 회화에서는 시와 그림의 관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위와 같은 현상은 곧바로 북송시대 선화(宣和) 어화원(御畵院)에서 화가들을 시취(試取)할 때 시의 구절을 출제하여 그 내용이나 시정(詩情)을 가장 잘 포착한 화가를 당선시키는 제도로 이어졌다. 남송시대에는 시를 직접 화면에 쓰지는 않았으나 원형 부채의 뒷면에 앞면의 그림과 알맞은 시를 아름다운 서체로 적은 것이라든지 화첩의 상대 면에 그림과 시가 각각 배치된 것들이 남아있다.
화면에 직접 시를 써 넣는 전통은 원대(元代)에 와서 시작되었고 전선(錢選), 조맹부(趙孟頫) 등 초기 문인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에 자제시(自題詩)를 써넣기 시작하였다. 원사대가(元四大家)들, 특히 오진(吳鎭)과 예찬(倪瓚)은 시와 서예에 뛰어난 인물들이었으므로 자신의 그림에 자제시를 아름다운 서체로 적어 넣어 한 그림에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이루었다. 이러한 전통은 명(明), 청대(淸代)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조(正祖) 때부터 시작된 규장각(奎章閣)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제도에서 특별히 선정된 화원들의 우열을 가려내어 급여에 반영하기 위한 시험에 시 구절을 출제한 기록이 무수히 남아있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의 문인화가들 가운데 자제시를 그림에 적어 넣기도 하고 중국이나 조선의 유명한 시를 그림 위에 적어 넣어 그 시의(詩意)를 자신의 그림에 표현했음을 밝힌 것을 볼 수 있다. 전자의 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0∼1856) 의 「불이선란(不二禪蘭)」이며 후자는 허필(許佖, 1709∼1761)의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