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년(성종 14)에 십도(十道)의 설치와 동시에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절도사(節度使) · 도단련사(都團練使) · 단련사(團練使) · 자사(刺史) · 방어사(防禦使) 등의 군사적인 절도사 체제의 지방제도를 실시하였을 때 983년(성종 2)의 12 목(牧)을 12주절도사(州節度使)로 개편하고, 여기에 절도사를 장관으로 하는 12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중원도(中原道)에 속하는 청주절도사(淸州節度使)에 전절군(全節軍)을 두었는데, 이는 수도 개경 이남 지역에서의 청주 지역이 갖는 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도호부(都護府)가 국경지대에서의 국방에 중심을 두고 있었는데 비해서, 전절군을 비롯한 12군은 국내에서의 지방세력에 대한 견제뿐만 아니라 거란의 제1차 침입 이후 이들에 대한 대비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05년(목종 8)에 도단련사 · 단련사 · 자사 등이 혁파되어 절도사체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성격이 가장 강한 12군은 도호부와 함께 여전히 존속하였다.
1012년(현종 3)에 절도사마저 혁파되고 5도호 ·75 안무사(安撫使)가 새로 설치되면서 군사적 감찰기관에서 행정적인 지방관제로 전환함에 따라 청주절도사는 안무사로 개편되었다. 이 때 전절군을 비롯한 12군에 배치되었던 군대는 지방군 조직 속으로 흡수되어, 그 일부인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으로 되어 광군(光軍)과 함께 고려 주현군(州縣軍)의 2대 근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전절군은 1010년(현종 원년) 거란의 제2차 침입 이후 지방제도 정비 과정에서 주현군으로 흡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종이 개경을 떠나 전주 지역까지 파천(播遷)하면서 지방군과 지방세력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