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강수유고 판목 ( )

눌재강수유고 목판
눌재강수유고 목판
출판
유물
문화재
1666년(현종 7)에 눌재 박증영(朴增榮, 1464∼1493)과 그의 아들 강수 박훈(朴薰, 1484∼1540)의 시문집인 『눌재강수유고』를 간행하기 위하여 새긴 판목.
정의
1666년(현종 7)에 눌재 박증영(朴增榮, 1464∼1493)과 그의 아들 강수 박훈(朴薰, 1484∼1540)의 시문집인 『눌재강수유고』를 간행하기 위하여 새긴 판목.
서지적 사항

목판은 모두 31매로, 판목은 대체로 세로 22.0㎝, 가로 45.0㎝, 두께 3.3㎝이며, 양면 판각이다. 판광(板匡)은 사주쌍변(四周雙邊), 세로 20.5㎝, 가로 33.0㎝으로, 유계(有界), 서(序)는 5항 10자, 『눌재유고』와 『강수유고』는 10항 20자, 『눌재유필』과 『강수유필』은 8항 14자에서 15자,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서(序)에는 서제(序題)와 장차(張次), 『눌재유고』에는 제명(題名)과 권차(卷次), 『강수유고』와 『눌재유필』 그리고 『강수유필』에는 제명과 장차가 있다. 판목은 원래 38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본문 7매과 발 1매가 없어져 현전하는 것은 31매이다.

내용

강수 박훈의 현손 박정룡(朴廷龍) · 박정린(朴廷麟) · 박정표(朴廷彪) · 박정해 등이 성종 때에 교리를 지낸 박증영과 중종 때에 장령(掌令)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그의 아들 박훈의 유고를 수습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서를 붙여 1666년에 2책으로 초간(初刊)하였다. 본편에는 박증영의 사(詞) · 부(賦) · 조(操) · 시(詩) · 소(疏) · 응제문(應製文) · 표(表) · 제문(祭文) · 서(書) · 묘갈(墓碣) · 예사(禮辭) 등이 수록되고, 『강수유고』가 부록되어 있다.

초간 이래로 1902년에 후손 박영문(朴永文)이 목활자로 속간(續刊)한 바 있으며, 이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1974년에 박영순(朴榮淳)이 석판 1책으로 속간한 바 있고, 1977년에 박성수(朴性洙)가 석판 1책으로 간행한 바 있다.

1902년의 속간판과 비교하여 수록된 시문이 매우 적고 편차(編次)가 크게 다르며, 『강수실기』에 “병오년(1666)에 유고가 간행되어 판은 공효공(恭孝公)의 사우(祠宇)에 보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판목은 초간본의 것으로 추정된다.

판목은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신촌리 공효사(恭孝祠)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2년부터 강외(江外)초등학교 향토사자료관에 전시되어 왔는데, 1993년 소유자인 밀양박씨 눌재공파 문중에서 청주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 1995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여러 국학기관에 소장되어 남아있는 『눌재강수유고』는 1902년에 속간한 활자본으로, 본 판목으로 찍은 인쇄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료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충청지역의 현존판목』(김영진, 1997)
『눌재강수유고판목조사서』(김영진, 청주대학교 박물관보, 1994)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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