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무신 권희학의 수적인 『연행일기(燕行日記)』 · 『서행일기(西行日記)』 · 『남정목록(南征目錄)』 · 『감고당집(感顧堂集)』 등과 그와 관련된 각종 고문서.
『연행일기』 · 『서행일기』는 수고본(手稿本)이며, 각각 1책 63장과 1책 42장이다. 『남정목록』은 목판본이며 4권 2책, 『감고당집』은 후대 필사본이며 12권 5책이다.
권희학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중(文仲), 호는 화촌(花村), 자호(自號)는 감고당(感顧堂)이다. 안동부의 명문 이족(吏族) 출신으로 그 선조들은 호장직(戶長職)을 세습해 왔다. 안동부 향리인 권명형(權命逈)의 아들이다. 일찍이 지인(知印)으로 향역(鄕役)을 지고 있을 때 안동부사로 부임해 온 최석정(崔錫鼎)에게 발탁되어 그를 따라 상경하여 모시면서 한미한 출신성분을 극복하고 출세할 수 있는 발판을 잡게 되었다.
1697년(숙종 23)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최석정의 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교련관(敎鍊官)이 되고, 그 뒤 첨사(僉使) · 오위장(五衛將) · 운산군수(雲山郡守) · 장연부사(長淵府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세웠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금위영교련관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안성 · 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난을 평정,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책록됨과 동시에 종2품에 승계(陞階)되었다. 이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구담리(九潭里)에 감고당(感顧堂)을 짓고 거처하다가 71세로 죽었다.
『연행일기』는 권희학이 26세 때에 1697년(숙종 23) 윤3월 29일부터 동년 8월 3일까지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왕세자(뒤의 경종)의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연경(燕京: 청나라 수도, 지금의 베이징)에 갈 때 자제지역(子弟之役)으로 막료가 되어 수행하면서 쓴 일기이다. 내용은 대체로 날짜별로 노정과 관련된 사항 즉 서울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연로(沿路)의 풍경 · 견문(見聞) · 건물 · 성지(城址) · 인물 · 사신의 거동 · 북경의 풍경 · 연경에서의 공식적인 주청절차 등에 관한 사정과 음시(吟詩)를 기록하였다. 특히 최석정이 즉석에서 읊은 시를 수록한 것이 많다.
『서행일기』는 1698년 3월 13일부터 동년 5월 30일까지 최석정이 해운시랑영사사(海運侍郞迎謝使)로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행차할 때 종사관으로 수행하면서 연로의 관부 · 성첩(城堞) · 인물 등에 관한 서술 · 견문 · 음시 등을 기술한 일기이다.
『남정목록』은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 때 교련관(敎鍊官)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종군(從軍)하며 쓴 일기이다.
『감고당집』은 권희학의 시문과 일기류를 모은 문집이다. 권1에는 시(詩) · 설(說) · 기(記) · 연행일록 상, 권2에는 연행일록 하와 서행일록, 권3에서 권6까지는 남정이록, 권7에는 제문(祭文) · 전문(箋文) · 서(序), 권8에서 권12까지는 부록이다.
고문서(古文書)로는 ① 권희학 · 권덕린(權德麟) · 권진규(權震奎) 등의 교지(敎旨) · 첩지(牒旨) 수십 장, ② 권희규(權喜奎) · 권희학 · 권덕린 · 권간(權諫) · 권눌(權訥) 등 여러 대에 걸친 내외 4조(四祖)와 소유노비를 상세히 기록한 호구단자(戶口單子) 및 준호구(準戶口) 수십 장, ③ 1751년(영조 27) 권희학의 처 김씨가 토지 · 노비를 구분하여 처리한 가산분재기(家産分財記) 1매로 장지(壯紙)에 작성된 것, ④ 권희학이 공신사패조(功臣賜牌條)로 하사 받은 노비 26구(口)와 사노비(私奴婢) 50구가 등재된 사패노비안(賜牌奴婢案), ⑤ 전답매매명문(田畓賣買明文) 및 권희학의 녹권(錄券) · 고목(告目) · 전령(傳令) · 시권(試券) 등이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 권용기(權容基)가 소장하고 있고, 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감고당문적은 향리 신분에서 출세한 권희학 가문에 관한 것으로 넓은 의미의 중인층에 의해 서술되고 작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연행일기』의 경우는 권희학이 20대 젊은이로서의 작자의 호기심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고, 공신전(功臣田)으로 지급받은 사패노비안의 경우는 당시 공신들에게 하사된 토지와 노비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