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묘(家廟)라고도 하며, 왕실의 것은 종묘(宗廟)라 한다. 고례(古禮)에서는 사당을 종묘 또는 예묘(禮廟)라고 하였는데, 주자의 ≪가례 家禮≫에서는 사당이라고 칭하여 이것이 통용되었으며 왕실의 종묘와 구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사당이 있었는데, 왕가(王家)의 전례(典禮)로 시작하여 일반 가정에서 행하여야 할 절차까지 마련되어왔다.
우리 나라에 사당제도가 유입되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하겠으나, 일반화하기는 고려 말이며 조선 중기 이후에 와서 더욱 철저하게 실행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남해왕 3년(6) 봄에 시조 혁거세의 묘(廟)를 세웠다고 하고, 또 36대 혜공왕 12년(776)에 비로소 5묘를 정하고 13대 미추왕을 김성(金姓)의 시조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예기 禮記≫ 왕제(王制)에 천자(天子)는 3소(昭) 3목(穆)과 태조묘(太祖廟)를 포함한 7묘로 하고, 제후는 2소 2목과 태조묘를 포함한 5묘로 하고, 대부는 1소 1목과 태조묘를 포함한 3묘로 하고, 사(士)는 1묘, 서인(庶人)은 침에서 제사한다고 한 것에 의해 신라에서도 5묘를 정한 것이다.
태조의 신주를 북단(北端)에 남향하여 모시고 그 앞에 좌측 즉, 동쪽에 2세·4세·6세를 모시어 소(昭)라 하고 우측인 서쪽에 3세·5세·7세를 모시어 목(穆)이라 하되 모두 남향하였다. ≪가례≫에서는 사대부집에서 사당에 4대의 신주를 일렬로 열향(列享)하여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당의 구조는 북단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1가(架)를 설치하고 4등분하여 감실(龕室)을 만들되 나무판으로 막아서 구분하고, 서쪽 제1감실에 고조고비(高祖考妣), 다음이 증조고비(曾祖考妣), 다음이 조고비(祖考妣) 그리고 맨 끝인 동쪽에 고비(考妣)의 순으로 신주를 모신다. 만약에 감실 네 개를 만들었어도 증조(曾祖)에서 갈라진 소종(小宗)의 종가일 때에는 맨 서쪽의 감실을 하나 비워둔다.
그리고 조(祖)에서 갈라진 소종일 때에는 서쪽의 두 개를, 그리고 고(考)에서 갈라진 소종일 때에는 세 개를 비워 맨 동쪽에만 모시며, 새로 대종(大宗)을 이루었을 때라도 4대가 차지 않으면 위와 마찬가지로 한다.
그리고 방친(傍親) 가운데 후손이 없는 사람의 신주는 차례대로 해당 감실에 반부(班祔)하며, 종조부모(從祖父母)의 신주는 고조의 감실에, 중숙부모(仲叔父母)의 신주는 증조의 감실에, 처와 아우와 제수의 신주는 조(祖)의 감실에, 아들·며느리·조카·질부의 신주는 고(考)의 감실에 각각 반부한다. 만약에 손자나 손부일 때에도 마찬가지로 1대를 걸러서 조(祖)에게 반부하되 모두 각위(各位)의 동쪽 끝에 서쪽을 향하여 부(祔)한다.
이 밖에 어린이의 제사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하였다. 즉, 어린이의 죽음을 상(殤)이라 부르고 이를 또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1세에서 7세까지의 죽음을 무복지상(無服之殤)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다음 8세에서 11세까지를 하상(下殤)이라 하고 제사는 부모의 생전에 한하며, 12세에서 15세까지 중상(中殤)이라 하고 제사는 형제의 생전까지로 하며, 16세에서 19세까지를 장상(長殤)이라 하고 제사는 형제의 자녀대까지로 한다.
그리고 20세 이상의 성인 가운데 후손이 없이 죽었을 때에는 제사를 형제의 손자대까지 지내고, 서자(庶子)의 경우는 어려서 죽었든 성인이 되어 후손이 없이 죽었든 조고비(祖考妣)에 반부한다. 서모(庶母)는 선당에 모시지 않고 아들이 사실(私室)에서 제사를 지내되 생전에 한한다.
사당은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지어야 하니 그 위치는 정침(正寢) 동쪽으로 하고, 사당이 있는 집은 종자(宗子)가 대대로 지켜야 하며, 부득이한 때를 제외하고는 헐지 않는다. 사당은 3칸에 5가(架)로 하되 안에는 전(磚)을 깔거나 나무판자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편다. 그리고 중간 도리 밑에 문을 만들어 중문(中門)이라 하고 칸마다 4문짝을 달아 분합문(分闔門)이라 한다.
분합문 밖에 3급(級)인 두 섬돌을 놓는데, 동쪽을 조계(祚階)라 하고 서쪽을 서계(西階)라 부른다. 사당의 향배(向背)는 앞을 남, 뒤를 북으로 보고, 만약 가세가 빈한하여 집터가 좁으면 다만 1칸만 세워도 된다.
사당 섬돌 아래에 터가 넓고 좁음에 따라 지붕을 올려 덮고 여러 집안 사람이 내외(內外)로 갈라 차례대로 서 있게 하는데, 이를 서립옥(序立屋)이라 한다.
김장생(金長生)은 “서립옥의 제조는 사당 앞 처마와 지붕이 서로 맞닿아 마치 능침(陵寢)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이하고 두 섬돌 사이에 향탁(香卓)을 놓아둔다.” 하였으나, 이재(李縡)는 이에 대하여 “향탁을 서립옥에 놓아두는 것은 넓이가 좁아 비가 들이치고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옳지 않을 뿐더러 서립옥을 정자각처럼 짓는다면 참람될 우려가 있으며 또 ≪가례≫의 본주(本註)로 보아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손이 번성하여 몇백명에 이른다고 하면 긴 정자각으로 된 종옥(縱屋)에 다 수용할 수 없으며 본주에 장단(長短)에 따른다 하지 않고 광협(廣狹)에 따라 지붕을 올린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횡옥(橫屋)임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송시열(宋時烈)도 횡옥이 옳다 하였으며 만약 두 섬돌 사이에 향탁 놓을 일을 걱정한다면 횡옥의 가운데에 놓아도 두 섬돌 사이에 놓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반드시 두 섬돌 사이에 바로 놓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서립옥의 동쪽에 종(縱)으로 서향하여 3칸의 주고(廚庫)를 짓되 북쪽에 있는 1칸에 유서(遺書)와 의물(衣物)을 보관하고, 가운데 1칸에 제기(祭器)를 보관하며 나머지 남쪽 1칸을 신주(神廚)로 삼아 제수(祭需)를 만들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따뜻하게 덥히는 곳으로 사용한다.
만약 터가 좁아서 사당을 1칸만 짓게 되면 주고를 세울 수 없으니 사당 안 동쪽과 서쪽의 벽에 큰 궤(櫃)를 하나씩 만들어놓고 서쪽에 있는 궤에는 유서와 의물을, 동쪽에 있는 궤에는 제기를 각각 보관한다.
그리고 사당과 주고를 둘러 네모난 담을 쌓고 앞쪽에 외문(外門)을 낸다. 외문은 사당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사당의 중문과 마주보게 되며, 외문의 동쪽과 서쪽은 바로 담에 이어지게 한다.
사당 안에는 감실마다 탁자 위에 주독(主櫝)을 놓고 그 속에 신주를 모시며, 감실 밖에는 각각 작은 발을 내리고 그 발 밖의 사당 한가운데에 향탁을 놓고 향탁 위에는 동쪽에 향합(香盒), 서쪽에 향로(香爐)를 놓아두며, 사당 밖 두 섬돌 사이에 둔 향탁 위에도 마찬가지로 향로와 향합을 놓아둔다.
감실 안에 놓아둔 탁자는 각각 좌면지(座面紙), 즉 유지(油紙)로 덮어두며, 그 위 북쪽 끝에 좌료[坐褥]라는 작은 방석을 깔고 그 위에 주독을 놓으며, 반부위(班祔位)는 각각 해당하는 조위(祖位)에 부(祔)하는 것이 원칙이나 동쪽과 서쪽 끝에 서향 또는 동향하여 좌료 위에 모시기도 한다. 사당 안에 구비할 제구(諸具)는 다음과 같다.
① 감실, ② 대탁(大卓):각 감실 안에 놓고 북단에는 신주를 모시고, 동서단에는 부주(祔主)를 모시며 남단에는 제물을 진설한다. ③ 좌료:각위마다 둔다. ④ 좌면지:유지를 쓰며 각위마다 있다. ⑤ 식건(拭巾):행주로서 각위마다 둔다. ⑥ 발[簾]:각 위마다 감실 앞에 드리운다. ⑦ 자리:지의(地衣)이며 바닥에 편다. ⑧ 향안(香案):사당 안과 밖의 두 섬돌 사이에 놓아둔다.
⑨ 향합:사당 안과 밖에 각각 놓는다. ⑩ 향시(香匕):사당 안과 밖에 각각 준비한다. ⑪ 화저(火箸):사당 안과 밖에 각각 준비한다. 그리고 ≪예서 禮書≫에는 없으나 촛대도 한 쌍을 최존위(最尊位)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동서로 놓아두는 것이 통례이다.
사당에서 행하는 의식으로서는 신알례(晨謁禮)·출입고(出入告)·삭참(朔參)·망참(望參)·정조참(正朝參)·동지참(冬至參)·속절다례(俗節茶禮)·천신례(薦新禮)·유사고(有事告)가 있다.
그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도 부조묘(不祧廟)가 있을 경우에는 가묘 이외에 따로 사당을 가묘 서쪽에 짓고 사당의 절차와 같이하며, 따로 별묘를 짓지 못할 때에는 가묘의 맨 서쪽 1칸을 나무판자로 막고 별묘의 형식을 갖춘다.
오늘날은 오래된 별묘는 그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나 새로 신주를 조성하는 집안이 별로 없어서 사당은 특별한 경우에만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