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7구(軀). 높이는 최고 5.5m, 최저 1.4m. 좌상 외에는 모두 장대한 거상(巨像)들이다. 원래 불상들은 개울가 옛 절터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2년 고종 연간에 용화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중창하고 이 불상들을 봉안하게 되었다.
왼쪽 세 번째 불상[向左佛像]은 육계가 유난히 높직하고 크며, 나발(螺髮) 또한 굵고 큼직하여 특징적으로 보인다. 얼굴은 장대하고 원만한 편이어서 박력을 느끼게 한다. 입을 제외한 이목구비가 비례적으로 커서 잘 조화되고 있다.
신체는 장대하고 우람한 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상이다. 그러나 허리나 가슴의 표현에서 양감이나 탄력감이 없어지고 건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체구에 비해서 큼직하게 보이는 두 손은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었고, 왼손을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지었다.
두 손 모두 집게손가락만 펴고 있어서 고풍(古風)이 엿보인다. 옷은 통견의(通肩衣)로 두 어깨를 걸쳐 다리로 흘러내렸는데, 가슴에는 U자형으로 트여 있고 여기에는 卍자가 표시되었다. 이 아래 승각기인 상내의와 하내의인 군의가 보이며 이를 묶은 띠 매듭도 표현되었다.
불의는 주로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띠주름을 혼합했다. 신라 불상에 비하여 탄력성이 부족하다. 얼굴이나 체구의 형태, 옷주름의 선묘, 卍자 등 세부 표현에 이르기까지 고려 초기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거구의 불상이라 하겠다.
왼쪽 다섯 번째의 불상 역시 장대한 형태이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비례적으로 알맞게 솟아 있다. 얼굴은 앞 상보다는 정제되었고 이목구비도 알맞은 편이다. 거구의 신체는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편이며 양감은 풍부하지 못하다.
그러나 허리나 팔의 굴곡이 뚜렷해서 인체미를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불의는 통견의인데 굽타식으로 목 주위에서 목깃이 반전하는 착의법이다.
옷주름은 V자형으로 하반신까지 표현하였는데, 돌기 주름이면서 구불구불한 선묘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구불구불한 선이 불상 조각에 표현된 것은 충주 탄금대 마애불 등 충청북도 혹은 경기도 일대에 다소의 예가 남아 있다. 그래서 시대적·지방적 양식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구불구불한 물결 선묘는 아직도 굴곡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가슴의 ♧꼴 꽃무늬 등 도식적인 특징도 나타내고 있어서 이 불상의 편년 설정에 참고된다.
이 불상의 뒷면[背面]에 거대한 나한상을 부조하였는데, 이러한 나한상은 이천 마애나한상 등과 친연성이 있다. 나한 신앙 혹은 불상 조성자와 연관성이 있는 상이 아닐까 한다.
또 하나의 거상은 머리와 두 손을 후보(後補)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중후한 모습인데, 체구 또한 건장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상체가 짧은 편인 거구의 이 신체는 양감이 풍부하지 않아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통견의 불의는 다소 두꺼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좌상들 역시 후보한 부분이 있다. 비만한 얼굴에 두건을 쓴 모습의 상은 하체가 길고 건장하지만 세련미는 없다. 왼손을 들어 병을 잡고 있으며, 옷자락 무늬도 혼란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의 7구 거상들은 한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당대 석불거상군(石佛巨像群)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양식적 특징이나 형식적 내용 등으로 보아 고려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