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은 관동군 출신의 대한민국 군인이다. 1920년에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1956년 사망했다. 1940년 신징의 관동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43년 상하이에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해방 이후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하여 월남했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에서 근무하며 좌익세력 숙청에 주력했다. 이후 정보국 3과, 경남지구 방첩대 등에 재직하며 공안사건을 처리했다. 정치적 목적과 성과주의로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신초식 등에 의한 저격으로 사망했다.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했다. 4년제 사립 덕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 2년 과정을 마친 후 가다쿠라제사[片倉製絲]공장에서 2년간 직공으로 일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창춘[長春]역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40년 신징[新京]의 관동군(關東軍) 헌병교습소에 입소했다.
1941년 4월 교육을 마친 후 일본 관동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다가, 10월 일본 중지군(中支軍)의 아마카스[甘粕]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어 소만(蘇滿) 국경 부근으로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를 수집했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싱안베이성[興安北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를 이용하여 소만 국경에서 활동하던 지하조직을 색출, 다수의 조직원을 체포했다. 그 공로로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고, 1943년 9월부터 만주리(滿洲里)헌병대 및 면도하(免渡河)헌병대 분견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다수의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1945년 11월 '전범(戰犯)'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송 도중 탈출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1946년 4월 다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다시 탈출하여 월남했다.
이후 만주군 장교 출신들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에 입대, 일반 사병 및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했고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3기로 입교했다. 단기교육을 마치고 그해 4월 소위로 임관,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주임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숙군(肅軍)'사업을 벌여 국방경비대 내부의 좌익세력 숙청에 주력했다.
1948년 1월 중위로, 정부 수립 이후 대위로 진급했고 방첩부대의 전신인 정보국 3과(SIS : 특별조사과)에서 좌익 혐의자 조사를 담당했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본격적인 숙군사업을 전개, 군내 좌익세력을 대거 색출 · 처벌케 함으로써 소령으로 특진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도 이때 체포되었다.
1949년 6월 육군정보국 방첩 대장이 된 직후 벌어진 ‘김구 암살사건’에서 사건 당일 범인 안두희(安)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 특별 배려하면서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경남지구 방첩대(CIC) 대장을 거쳐, 10월 군 · 검 · 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재직했다. 군 · 검 · 경 합동수사본부는 ‘사건조작’ 등을 이유로 야당 의원들의 비판을 받고 1951년 5월 해체되었고, 그는 특무부대장으로 부임하여 각종 공안사건을 처리했다. 정치적 목적과 성과주의로 상당수의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53년 육군 준장, 195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6년 1월 30일 과거 부하였던 육군 대령 허태영(許泰榮)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 출신 신초식(申初湜) 등에 의한 저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장례식은 최초의 국군장(國軍葬)으로 안양의 사설 묘역에서 치뤄졌다.
묘비 앞면의 묘주명(墓主名)은 이승만 대통령이, 묘갈명(墓碣銘)은 이병도(李丙燾)가 지었다. 1998년 특무부대의 후신인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54년 미국 대통령 공로훈장, 1955년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