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경기도 연천에서 출생했다. 시조시인 김오남(金午男)이 여동생이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년 3·1운동 관련으로 제적되어 보성(普成)고등보통학교로 전학, 1921년 졸업했다. 이듬해인 192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7년에 졸업했다. 귀국 후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0년 경부터 『동아일보』 등에 시를 게재했고, 포(E. A. Poe)의 「애너벨리」(『신생(新生)』 27, 1931.1), 키츠(J. Keats)의 「희람고옹부(希臘古甕賦)」(『신생』 31, 1931.5) 등의 외국문학을 번역·소개했다. 1933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1938년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수록한 시집 『망향(望鄕)』을 출판했다. 같은 해 6월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내조적 역할 공고'를 목적으로 조직된 이화애국자녀단(梨花愛國子女團 : 단장 김활란)의 간사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 '국민문학 건설과 내선일체 구현'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에는 「땀의 기쁨」(『반도의 빛[半島の光]』 2월호)이라는 글로 일제가 추진하던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에 대한 학생들의 근로봉사를 독려하고 교육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해 2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싱가폴(Singapore) 함락을 기념하여 '신가파(新加坡) 함락과 문화인의 감격'이라는 주제로 명사들의 글을 연재할 때 「성업(聖業)의 기초(基礎) 완성(完成)」(『매일신보』 1942.2.19)을 써서 이를 축하했다. 1943년에는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4)를 쓰기도 했다. 같은해 영문학 강의가 폐지되면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이 강원도 지사로 임명했으나 곧 사임했고,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보스턴(Boston)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했고,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의 학무처장을 맡았다. 1950년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를 간행했고, 코리아타임즈사의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1951년 6월 22일 부산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