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1933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도화교사 황술조(黃述祖)에게 데생을 배웠고, 1933년 일본 가와바다[川端]화학교를 거쳐 이듬해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소조부에 입학, 1939년에 졸업했다. 1938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1939년의 제18회 조선미전에서는 「소녀입상」, 1940년 제19회에서는 「목동」으로 특선했고, 1941년 제20회에서는 「어떤 감정」으로 창덕궁상을 받았다. 1942년 제21회에서 특선, 총독상을 받은 「여명」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노동자가 해머를 들고 노동현장으로 나서는 모습을 조형한 작품이다. 최후의 조선미전인 1944년의 제23회에 출품한 「제4반」은 작업도구를 멘 반라의 여성을 표현하였는데, 당시 강조되던 '여성동원'을 고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 및 조각분과 역원을 거쳤다.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에서는 심사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대동아 건설의 소리」를 출품했다.
해방 이후 친일행위가 문제되어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했다. 경성사범학교, 경성정신여학교, 풍문여자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서울시 문화위원회에 선임되었고, 국전(國展)의 창설위원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중등미술교과서 발간에도 참여해 해방 이후 미술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55),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상」(1958), 「안중근의사상」(1959), 「세종대왕상」(1968), 「김구선생상」(1968) 등의 동상과 「4·19학생혁명기념탑」(1963) 등의 기념물을 제작했다. 홍익대 및 이화여대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으며, 1992년 2월 16일 사망했다.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1958), 3·1문화상 예술본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1969), 은관문화훈장(1982)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