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

정치
인물
해방 이후 현역 육군 소위로 김구를 암살한 군인. 암살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7년
사망 연도
1996년 10월 23일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안두희는 해방 이후 현역 육군 소위로 김구를 암살한 군인이다. 1917년 평북 용천 출생으로 해방 후 월남해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의 저택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5년으로 감형되었다가 6·25전쟁 당시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에게 1996년 10월 피살되었다. 김구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고, 이승만은 직접 개입의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의
해방 이후 현역 육군 소위로 김구를 암살한 군인. 암살자.
개설

평안북도 용천 출생. 신의주 부호였던 병서(秉瑞)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안산 김씨이다. 해방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현역 육군 소위로 1949년 김구를 살해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의주와 신의주의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다. 1939년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휘성 회남(淮南), 강소성 서주(徐州) 등을 전전했으며, 회남에서는 일본군 관리기관인 군납품판매조합의 이사로 일했고, 서주에서는 요식업을 했다. 1945년 1월 귀국해서 용암포 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1947년 신의주에서 월남한 뒤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에 가입해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이었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1949년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의 추천으로 한독당원이 되었는데 이는 김구(金九)를 죽이기 위한 의도적인 포석이었으며, 당내 내분으로 조작해 배후를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현역 육군 포병소위로서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의 저택인 경교장(京橋莊)에서 4발의 총탄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에서 종신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같은 해 11월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의 상신을 받아들여 징역15년으로 감형되었다. 서울육군 형무소에서 복역 중 6 · 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7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7월 10일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의 특별명령 4호로 육군 소위에 원대 복귀하였다. 9월에 중위로 진급하였고, 1952년 2월 15일 신성모의 명령으로 형이 면제되었으며,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1군사령부 관내 전사단에 공급하는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창업하여 경영하였다. 그는 중형을 면한데다가 1년 여밖에 복역하지 않았으며,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하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그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측면이 있었다.

1960년 4 · 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개월 여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 · 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56년 10월 안두희에게 폭행 당한 양구경찰서 순경 길종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안두희를 고소했으며, 결국 1962년 1월 25일 특수 폭행 치상죄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65년 12월 곽태영이 안두희를 테러했으며, 1966년 김지웅 자신이 김구 암살의 총책임자라고 일본에서 폭로하는 등 진상규명의 분위기가 일자 안두희는 미국 이민을 시도하였다.

1971년 서북청년회 회원이자 한독당원으로 안두희와 김구 살해를 공모한 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년 4월 권중희(權重熙)와 김석용이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 1992년 11월 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위원장 姜信玉 의원)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1995년 12월에 작성하였다.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당시 46세, 경기도 부천소신여객 버스 운전사)에게 1996년 10월 23일 피살되었다.

평가

안두희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김지웅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김구 암살에는 당시 장은산(張恩山) 포병사령관과 김창룡(金昌龍) 육군정보국 방첩대장,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부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재판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직접적인 지령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암살 사건에서 최고위층의 개입을 구체적인 물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승만에게는 도덕적 책임과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저서

1955년 『시역의 고민』이라는 옥중일기를 간행하였으나, 군에서 대필해 주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참고문헌

『김구암살범 안두희 배후-버스 운전기사 박기서 안두희 살해 내막-』(문일석, 한솔미디어, 1996)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국회 법제사법위원회, 1995)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발로 밝힌 백범암살사건의 진상-』(권중희, 돌베개, 1994)
『패배한 암살』(학민사, 1992)
『암살작전-김구와 이승만과 안두희-』(손충무, 교학사, 1976)
「공작원 안두희와 그의 시대」(정병준, 『역사비평』69호, 2004)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http://www.kimkoo.or.kr)
집필자
이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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