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쪽은 철산군, 동북쪽은 신의주시·의주군, 서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요령성 안동현(安東縣)과 마주보며, 서남쪽은 황해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4°11′∼124°41′, 북위 39°49′∼40°04′에 위치하며, 면적 570㎢, 인구 12만 4486명(1945년 현재)이다. 1개 읍 11개 면 153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용암포읍 용암동이다.
동부에 강남산맥(江南山脈)의 여맥이 미쳐 용골산(龍骨山, 477m) 등의 낮은 구릉이 연이어 있으나, 지형은 험준하지 않다. 서북부의 평야는 압록강과 삼교천(三橋川)에 의해 형성된 복합삼각주로서 평탄하고 비옥한 평야지대이다. 압록강 하구에는 신주평(信倜坪)·황초평(黃草坪) 등의 하중도(河中島)가 발달하였다.
해안선의 길이는 35.6㎞로 리아스식해안에 가깝고 간석지가 발달했으며, 남시(南市) 부근의 남부해안에는 염전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앞바다에는 신도(薪島)·다사도(多獅島)·대다사도(大多獅島)·대연동도(大煙童島)·가차도(加次島)·노적도(露積島) 등의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신도 서쪽에 있는 마안도(馬鞍島)는 우리 나라 극서단에 위치하는 섬이며, 다사도항은 이 지역의 유일한 부동(不凍)의 좋은 항구이다.
대륙성 기후에 속하나 해양의 영향을 받아, 도내의 내륙지방보다는 겨울 기온이 높은 편이다. 남시는 연평균기온 8.9℃, 1월 평균기온 -8.9℃, 8월 평균기온 23.8℃, 연강수량 895.2㎜이다. 그러나 용암포는 겨울 기온이 더 낮고, 연강수량이 945㎜이다. 첫서리는 10월 19일경, 마지막 서리는 4월 14일경에 내린다.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이 군뿐 아니라 평안북도에서 아직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이 시대에 사람이 거주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쌍학리·용연리·신암리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적어도 이 시대에는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고, 청동기문화도 쌍학리·신암리·왕산·옥산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을 거쳐 한사군·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이 군은 민족과 문화이동의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시대에 이곳에 군현이 설치되었다고 짐작되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에 속하였다.
[고 려]
이곳은 본래 안흥군(安興郡)이라 불렸으며,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徐熙)의 활약으로 수복한 강동6주(江東六州) 가운데 한 곳이다. 고려는 강동6주를 수복한 뒤 견고한 성채를 축조해 서북면 방면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1014년(현종 5)안흥군을 용주(龍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어 거란의 침범에 대비하게 하였다.
1219년(고종 6) 거란왕자 금산(金山)·금시(金始)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했을 때 용주도 피해를 입었다고 짐작된다. 1231년 몽고의 제1차 침입 때 용주는 몽고군에게 포위당했다가 항복해 부사 위소(魏玿)가 포로로 잡혔고, 1236년 6월 제3차 침입 때 몽고군이 선주(宣州) 형제산(兄弟山)과 그 부근지역에 널리 주둔했다는 것으로 보아 용주도 유린당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용주는 서북면의 요충이었기 때문에 거란·몽고·홍건족이 침입할 때마다 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겪었다. 1270년(원종 11) 원나라의 동녕부에 속했다가 1278년(충렬왕 4) 복구되었으며, 용만부(龍灣府)로 개칭되었다. 1310년(충선왕 2) 다시 용주로 고쳐졌고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조 선]
1404년(태종 4)의주 이언(伊彦)의 땅을 나누어서 붙이고 용문군(龍門郡)이라 하다가 1413년 10월용천군으로 개칭하였다. 관원은 군수·훈도 각 1원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호구는 379호, 1,132명이었고, 군정은 익군(翼軍) 85명, 수성군(守城軍) 27명, 선군(船軍) 45명으로 고려시대보다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의주진관(義州鎭管) 소속으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원이 두어졌다.
1620년(광해군 12)용천부로 승격되었고, 1641년(인조 19) 1월 부치(府治)가 용골(龍骨)에서 양책참(良策站)으로 옮겨졌으며, 1692년(숙종 18) 토포사(討捕使)를 겸해 2품아문으로 승격되었다.
정묘호란 때 이광립(李光立)·이립(李立)·김우(金佑) 등은 철산의병 정봉수(鄭鳳壽)·정기수(鄭麒壽) 형제와 함께 용골산성(龍骨山城)을 끝까지 지켰으며, 안준(安浚)은 의병을 모집해 용골산성장사준(張士浚)의 난을 평정하였다.
병자호란 때 안극함(安克諴)·차원철(車元轍)·장후건(張厚健)·차맹윤(車孟胤) 등은 적군에 잠입해 군중을 교란시키고 명나라와 내외합공(內外合攻)의 계략을 세우려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10방(坊)으로 편제되었고 호구는 8,435호, 3만 954명이었다.
1811년(순조 11) 12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16일 만에 청북8읍이 함락되었는데, 이 때 용천부사 권수(權琇)는 반란군에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의주로 도망했다가 군대를 수습해 정주전투에 참가하였다.
[근 대]
1895년 5월 지방관제를 개혁해 부·군제를 실시할 때 용천군으로 개편되어 의주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평안북도 용천군이 되었다. 1903년 러시아는 자국의 권익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압록강 상류의 삼림채벌권과 그 종업원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용암포를 비밀리에 조차(租借)해 군대를 파견하고, 부근을 점령해 포대를 구축하고 도시계획을 강행하였다.
이에 일본은 영국·일본동맹을 내세워 강력한 반격을 시도함으로써 노일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는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5월의 호구는 1만 935호, 5만 284명이었고 1943년의 호구는 2만 7276호, 15만 7993명이었는데, 이처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용암포의 발전과 1928년 다사도항(多獅島港)의 건설로 인구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28년 4월 군청을 용암포로 이전하였다.
평안북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주민의 반골적인 기질은 일제시대에 이 군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시켰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이기당(李基唐)·송자현(宋子賢)이 각각 7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대한보합단(大韓普合團)에 가입해 활약한 박초권(朴初權)·이세광(李世光)·조세원(趙世元),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송병조(宋秉祚), 구국과 애국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홍일(金弘壹) 등이 이곳 출신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 때 3월 4일부터 5월까지 28회의 시위에 2만 7600명이 동원되어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554명이 체포되었다.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불이농장(不二農場)에서 1927년 2월에 일어난 소작쟁의는 우리 나라 농민운동사상 특기할 만하다.
1958∼1965년에 4, 5차례 발굴된 용천신암리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석기와 청동기유물이 다량 출토되었고, 용천왕산유적·용천리유적에서는 1959년과 1961년에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초기의 유물·유적지가 발굴되었다. 1962년과 1972년에는 용천군·정주군 일대의 신석기유적지와 용연리의 신석기유적지 등이 발굴되었다.
동상면 태흥동과 내중면 구암동 면계에 있는 용골산정에는 높이 4m, 너비 4m, 길이 1,800m의 석축으로 된 용골산성(龍骨山城)이 있으며, 동상면 성동동에는 고읍성터가 있다. 고읍성은 고읍을 에워싼 석성으로 둘레 약 4㎞, 높이 4∼5m이다.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터가 있고 동쪽에 수구문(水口門)이 있으며, 북문과 남문은 산정에 있고 동문은 평지에 있다.
또 동상면 동부동에 있는 용천다라니석당(龍川陀羅尼石幢)은 높이 5.94m로 맨 밑에 2단의 기단이 있고 위에 2층의 앉은돌이 있으며, 육각형이다. 동하면 사흥동에 있는 용천서문밖 석당(龍川西門-石幢)은 높이 4m로 상하 2단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2층의 갑석이 있으며, 주위에 육각형의 석주가 세워져 있다. 석주의 한 면에는 ‘大佛頂陀羅尼幢(대불정다라니당)’이라는 음각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동상면 성동동 조개봉 위에 있는 용천구읍리석수(龍川舊邑里石獸)는 높이 1.66m의 해태 모양 석수로 2기가 있다. 또 용천구읍리석신(龍川舊邑里石神)은 높이 3.04m, 너비 90㎝의 곤사문천상(昆沙門天像)과 높이 3.45m, 너비 82㎝의 공작명왕상(孔雀明王像)이 있다.
사지로는 동상면 동산동용골산 운수곡의 속칭 운수사지(雲水寺址)와 동하면 법흥동의 왕진사지(王瑱寺址), 양광면 현가동의 진강사지(鎭江寺址) 등이 있고, 군내 여러 곳에 봉수대가 남아 있다.
이 군은 비옥한 평원지대로서 각종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만주와 접한 지리적 영향으로 오래 전부터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던 지역이다. 1870년경에는 28개의 서원이 있었으며, 1915년 통계로는 서당이 104개로 도내에서 가장 많았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03년을 전후해 지방 유지들이 군내 곳곳에 세운 사립학교가 많다.
사립학교로 입암(立巖)·입성(立成)·양시(楊市)·보명(普明)·협창(協昌)·덕일(德一)·정칙(正則)·구세(救世)·명신(明新)·보신(普信)학교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압박과 경영난으로 모두 폐교되고 양시학교만 남아 있었다.
공립학교로는 1926년에 인흥재(仁興齋) 자리에 동하(東下)공립보통학교가 개교했으며, 군내에 모두 19개의 공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밖에 각 면에 야학회(夜學會)가 있어 농한기를 이용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1930년에는 유치원도 설치되었다. 1922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어 군내 유지들이 적극 협력하였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8개, 개신교교회 27개가 있었으며, 1928년에는 이 군에 세워진 교회만으로 용천노회(龍川老會)가 조직되었다. 사회단체로는 양시기독청년회·입암기독청년회·용봉청년회·북성청년회·덕산구락부·오곡농예구락부 등이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장인 장모와 사위〉가 전한다. 옛날에 어떤 집에서 데릴사위를 얻었는데 사위가 주제넘게 굴어 장인 장모가 사위를 미워하고 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사위 몰래 만들어 먹었다.
어느 날 장인 장모가 떡을 해먹고 싶어서 일부러 사위에게 사냥을 해 오라고 하였다. 색시는 자기 신랑이 사냥 간다고 나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와 신랑에게 말하기를, “사냥 갔다 오라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당신 몰래 떡을 해먹으려고 하는 것이니까 조금 있다가 돌아와요.” 하고 일렀다.
사위는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 떡이 다 되었을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장인 장모는 떡을 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사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니, 장인은 재빨리 떡그릇을 쟁반에 올려 놓고, 장모는 소매 밑에다 날쌔게 감추었다.
사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사냥 가서 꿩이 한 마리 날아가길래 먹이를 놓았더니, 꿩이란 놈은 잽싸게 떡그릇이 장모 소매 밑에 들어가듯이 소나무숲 밑으로 숨어 버렸어요. 그리고 꿩을 쫓던 여자는 꿩이 보이지 않으니까 장인이 떡그릇을 쟁반에 올려 놓듯이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앉았어요.” 하고 말하였다. 사위가 이렇게 말하니까 장인 장모는 떡을 안 줄 수 없었다.
그 뒤 어느 날 장인 장모는 고깃국이 먹고 싶어서 사위를 이웃집에 집이엉 일을 하러 가라고 보냈다. 색시는 신랑이 나가자 뒤를 따라가서 “오늘 고깃국을 끓이니까 조금 있다가 저기 수챗구멍 밖에 와서 기다리면 국 한 그릇을 가져다주겠오.” 하고 말하였다. 국이 다 되자 색시는 몰래 국 한 그릇을 퍼 가지고 수챗구멍으로 내밀었다. 사위는 수챗구멍 밖에서 국을 받아 먹었다.
거의 다 먹고 있는데 장모가 나와서 수챗구멍에다 대고 오줌을 누었다. 그 오줌 누는 소리를 듣고 사위는 색시가 국을 또 한 그릇 가져다주는 줄 알고 빈 그릇을 내밀었다. 장모의 오줌은 사위가 내민 그릇에 넘쳤다. 사위는 ‘그만 그만’ 한다는 걸 “아! 아!” 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때는 해가 져서 좀 어두웠다.
어두운 수챗구멍에서 갑자기 ‘아! 아!’ 하고 큰 소리가 나니까 장모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장인도 나와 있었는데 사위는 수챗구멍 밖에서 그릇을 내던지며 “맛 좀 봐라.” 하고 외쳤다. 그릇은 장인의 머리에 맞고,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 “아아, 귀신이 없는 것은 아니구먼.” 했다고 한다.
압록강과 삼교천이 형성한 충적평야가 비교적 넓게 전개되었으며, 토질이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도내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밀·조·수수·옥수수·면화·대마 등이다. 쌀 생산량은 도내 2위이며, 밭농사는 2년3작의 방법으로 경작된다. 또한 누에치기와 축산도 활발하다.
연해에서는 조기·갈치·새우·도미·뱅어·숭어 등의 어획량이 많고, 조개·굴·백합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연안의 남시 부근에는 간석지를 이용한 천일제염업이 발달하였다. 압록강 하구에 있는 황초평·신주평·영문강(迎門崗)·경초평(鯨草坪) 등의 하중도는 갈[蘆] 생산지로 유명하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 군내에는 동문동(東門洞)의 부내장(付內場), 외산면(外山面)의 남장(南場), 서면(西面)의 서장(西場)이 있어 주로 쌀·콩·밀·보리·포목·생선·소금·옹기·잎담배·가축 등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902년에는 5일장으로 읍내장·남장·북장(北場)·점장(店場)·미곶장(彌串場) 등이 열렸다고 한다.
1926년 군내에는 운흥(雲興)에 용암포장이 4·9일, 남시장(南市場)이 1·10일, 부라면에 운향장(運餉場)이 1·6일, 외상면 정차동에 신남장(新南場)과 양시장(楊市場)이 3·8일에 열렸으며, 용암포에 용암포어시장과 부라면 선리동에 이도포어시장이 있어 주로 농산물·해산물·가축류·일용잡화 등이 거래되었다.
특히 용암포어시장은 4∼11월까지, 이도포어시장은 5∼11월까지 매일 열렸다. 양시장은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장으로, 본래 의주군에 속했으나 1907년 용천군에 속해 군내 시장 중 거래 규모가 가장 큰 장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교통이 편리하고 신의주에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 조건으로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양시에 알루미늄·두유(豆油) 관계 공장이 있으며, 용암포에 유지공장이 있다. 또한 북중면에는 트랙터·농기구제조공장과 항공기 부속품을 제작하는 동양경금속회사가 있으며, 원송동에는 용암포제련소가 있다. 여기에서는 의주의 제1·제2·신연(新延)·삼성(三成)·송풍(松豊)·성천(成川) 등의 광산에서 채광된 비철금속성 광석(금·은·동·납)을 제련한다. 〈嚴永植〉
경의선(京義線)이 동북부를 지나 군내 교통의 대동맥 역할을 하며, 신의주-양시-남시를 연결하는 양시선이 중앙을 통과하고, 양시역에서 용암포를 지나 다사도에 이르는 다사도선이 있다. 도로는 용암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신의주에 이르는 2등도로가 동서교통의 간선을 이루고, 동남쪽으로 남시·다사도·비현(枇峴)·철산(鐵山) 등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있다.
해상교통 역시 용암포가 중심이 되어 모든 정기항로가 이곳에서 기항되며, 신의주와의 사이에 기선의 왕래가 빈번하다. 그러나 용암포는 겨울철에 얼기 쉽고 항내가 깊지 못한 결점이 있어 다사도에 부동항을 축조하였다.
[용암포읍龍巖浦邑]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2248명(194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용암동이다. 1928년 용천군청의 신청사가 이전되면서 읍으로 되었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산간지대를 흐르는 압록강에 의해 운반된 토사가 쌓여 형성된 삼각주상에 위치해, 해수면과 비슷한 낮은 충적평야를 이룬다. 이 읍에 속한 섬으로는 매로리도(每路里島)·창암도(昌巖島)·조룡도(潮龍島) 등이 있다.
기후는 서해안에 면해 있어 내륙의 타지역보다 온난하다. 농업은 비옥한 충적평야를 대상으로 논농사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연안어업도 활발해 각종 수산물이 어획·가공된다. 또한 수륙교통이 편리해 물산의 집산지로서 상업·서비스업 등이 발달하였다. 용암(龍巖)·운흥(雲興)·신전(新田)·중흥(中興)·석성(石城)·신흥(新興)·진천(辰串)·소의(昭義)·서호(西湖)·소흥(昭興)·덕봉(德峰) 등 11개 동이 있다.
[내중면內中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300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당동이다. 동북쪽은 망월산·용골산·남산 등과 그 지맥이 뻗어 있어 산간지대를 이루나, 서쪽은 서애산(西艾山, 51m)을 제외한 대부분이 평야지대를 이루며 이곳에 소하천들이 흐른다. 농업은 논농사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 등이다.
동당(東堂)·당북(堂北)·남흥(南興)·사직(社稷)·도봉(道峰)·향봉(香峰)·대성(大成)·연곡(蓮谷)·동흥(東興)·동산(東山)·봉모(鳳毛)·당령(堂嶺)·모고(慕古)·명오(明五)·성곡(盛谷)·수정(壽亭)·동성(東城)·냉정(冷井)·구암(鳩巖)·응산(鷹山)·송산(松山) 등 21개 동이 있다.
[동상면東上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6,35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부동이다. 북부는 부인당산(夫人堂山)의 지맥이 마두산(馬頭山)과 천두산(天頭山, 667m)을 거쳐 동부의 산지를 형성했으며, 남쪽의 용골산(龍骨山, 476m), 서쪽의 남산(南山, 241m)·아후산(衙後山, 238m) 등의 지맥이 면의 여러 방향으로 이어져 대체로 낮은 구릉성 지대를 이룬다.
압록강의 지류인 회초강(回草江)이 이들 산지 사이를 흐르며 소규모의 평야를 발달시켰다. 농업은 비옥한 토질과 저평한 지형을 이용해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 등이다.
명승고적으로는 태흥동과 내중면의 경계에 용골산의 용골산성, 동부동의 다라니석당, 성동동의 구읍리석수와 석신, 그리고 고읍성터 등이 있다. 동부(東部)·서부(西部)·성동(城東)·쌍송(雙松)·봉곡(鳳谷)·태흥(泰興)·상북(上北)·대평(臺坪)·입석(立石)·동산(銅山)·건룡(乾龍)·사악(沙岳)·양책(良策) 등 13개 동이 있다.
[동하면東下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8,385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산동이다. 동쪽의 아후산·남산과 중앙부의 법흥산(法興山, 160m)의 지맥이 면내에 미쳐 대체로 낮은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농업은 구릉성 산지 사이의 비옥한 평지에서 주곡 중심의 논농사와 밭농사가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 등이다.
명승고적으로는 사흥동에 용천서문밖 석당과 왕진사지가 있다. 대산(臺山)·원서(元西)·덕흥(德興)·고령(古寧)·용산(龍山)·법흥(法興)·삼인(三仁)·대인(大仁)·사흥(社興)·학령(鶴嶺)·쌍학(雙鶴) 등 11개 동이 있다.
[부라면 府羅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548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단동이다. 북쪽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평야지대를 이룬다. 이 면에 속한 섬으로는 소다사도·문박도(門泊島)·대다사도·가차도·대연동도·소연동도·다사도·삽도 등이 있다.
특히 다사도는 원성동에서 2.7㎞ 떨어진 작은 섬으로 조석간만의 차가 작고, 겨울에 얼지 않으며, 1만 톤급 이상의 대형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천혜의 양항으로서 경제적 가치가 있으며, 압록강 수운도 함께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용암포읍 서호동에서 이 면의 원성동·선리동과 외하면의 반궁동을 잇는 방조제가 있어, 군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간석지를 이룬다.
기후는 바다에 면해 있어 내륙의 타지역보다 비교적 온난하다. 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구획정리된 농장개간지를 대상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천혜의 곡창지대로 품질 좋은 쌀이 생산된다. 연안어업도 활발해 많은 수산물이 생산되며, 수운교통이 편리해 각종 창고업·상업 등이 발달하였다.
중단(中端)·백송봉(栢松峰)·덕천(德川)·덕암(德巖)·동단(東端)·용승(龍升)·운룡(雲龍)·원성(元城)·서겸(西兼)·남겸(南兼)·북겸(北兼)·삼룡(三龍)·선리(船里)·백현(柏峴) 등 14개 동이 있다.
[북중면北中面]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9,627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북현동이다. 최고봉은 대산(大山, 59m)으로 대체로 평탄한 충적평야지대이다. 농업은 비옥하고 저평한 충적평야에서 주곡 위주의 논농사와 밭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 등이다. 또한 압록강에 접해 있어 압록강에 서식하는 담수어의 어획이 많다.
북현(北峴)·매장(梅長)·수봉(秀峰)·중성(中城)·서룡(西龍)·쌍성(雙城)·백암(白巖)·가성(加省)·동양(東陽)·진흥(眞興)·추정(楸亭)·하장(下長)·인고(仁古)·원송(元松)·동송(東松)·원봉(元峰)·용주(龍洲) 등 17개 동이 있다.
[신도면薪島面]
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인구 2,572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주동이다. 신도를 중심으로 마안도·초개도·양도(羊島)·세도(細島)·정족암도(丁足巖島) 등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신도의 동부는 동주동에 있는 삼각봉(三角峯, 90m)을 중심으로 산지를 이루며, 서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또 주위 해안은 압록강으로부터 운반된 토사가 퇴적되어 얕은 바다를 이룬다.
기후는 서해상에 위치해 바다의 영향을 받으므로 비교적 온난하다. 낮은 지대에서는 벼농사를 하나 서해와 접해 있어 어업에도 종사하며, 조기·갈치·새우 등이 잡힌다. 동주(東洲)·남주(南洲) 등 2개 동이 있다.
[양광면 楊光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58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충렬동이다. 중앙에 대유산(大遊山, 149m)·동덕산(東德山, 148m)·구연대봉(舊煙臺峰, 136m)과 그 지맥이 솟아 있으며, 삼교천이 서쪽으로 유입되어 구룡동을 지나 북진해 의주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파랑상으로 분포하며, 이곳에서 논농사와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유물·유적으로는 현가동에 진강사지가 있다. 충렬(忠烈)·용유(龍遊)·선화(善和)·용계(龍溪)·용덕(龍德)·학현(鶴峴)·충무(忠武)·미륵(彌勒)·송정(松亭)·현가(絃歌)·산두(山斗)·망양(望洋)·봉덕(鳳德) 등 13개 동이 있다.
[양서면 楊西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8,385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연동이다. 산지는 거의 없고 대체적으로 평탄한 충적평야지대를 이루며, 삼교천이 이곳을 망상으로 흐른다. 기후는 바다의 영향으로 내륙의 타지방보다 비교적 온난하다.
농업은 주곡 위주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조·콩 등이다. 용연(龍淵)·용봉(龍峰)·견일(見一)·팽량(彭梁)·동상(東上)·신성(新城)·북성(北城)·동평(東坪)·북평(北坪)·서망(西望)·동망(東望) 등 11개 동이 있다.
[양하면楊下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1101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시동동이다.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드물게 분포하는 저평한 충적평야지대이다. 북쪽에는 삼교천이 의주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기후는 바다의 영향으로 내륙의 타지방에 비해 비교적 온난하다. 농업은 주곡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명승지로 장송산(長松山) 북쪽 기슭에 건축기법이 정교하고 경관이 수려한 반곡사(盤谷寺)가 있다. 시동(市東)·시서(市西)·시남(市南)·시북(市北)·안심(安心)·오송(五松)·신안(新安)·구송(九松)·수송(秀松)·장송(長松)·신창(新倉)·신서(新西)·입암(立巖) 등 13개 동이 있다.
[외상면外上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3734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정차동이다. 북동쪽에 있는 망월산(望月山)의 지맥이 해암산과 발산으로 이어지며, 중앙부의 소하천(小河川)이 송하동·서석동·학무동을 거쳐 서해로 유입된다. 대체로 저평한 충적평야지대를 이루며, 이곳을 중심으로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콩 등이며, 연안어업도 활발하다. 특히 해안지방의 염전에서 소금이 많이 생산된다. 정차(停車)·신룡(新龍)·남시(南市)·동석(東石)·서석(西石)·송하(松下)·백하(栢下)·동발(東鉢)·서발(西鉢)·해현(海峴)·학무(鶴舞)·봉황(鳳凰)·학소(鶴巢)·안평(安平) 등 14개 동이 있다.
[외하면外下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1만 107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율곡동이다. 동쪽에 있는 해암산(海巖山)의 지맥이 두웅봉(杜雄峯, 84m)까지 이어져 있으나, 대체로 저평한 충적평야를 이룬다.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바다에 면해 있어 반농·반어의 생활을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콩 등이며 수산물 중에서 특히 조기의 어획량이 많다. 율곡(栗谷)·상호(上虎)·중호(中虎)·하호(下虎)·인봉(仁峰)·송흥(松興)·고의(做義)·청룡(靑龍)·순천(順川)·쌍기(雙機)·남기(南機)·남압(南鴨)·반궁(盤弓) 등 13개 동이 있다.
평안북도 북서부에 있는 군. 동쪽은 피현군, 남쪽은 염주군, 북쪽은 신의주시, 서쪽은 압록강과 황해에 면해 있다. 동경 124°18′∼124°33′, 북위 39°50′∼40°02′에 위치하며, 인구는 13만 40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시 용천군의 용암포읍·북중면·양하면·양서면·동하면·신도면의 전체 이와 부라면의 7개 이, 양광면의 3개 이, 신의주시의 13개 이로 개편되었다. 1961년 3월 쌍학리 일부가 분리되어 용송리에 편입되고, 1967년 10월 진흥리가 진흥노동자구로 개칭되었으며, 1982년 10월 신서리가 황금평리로 개칭되었다. 1988년 7월 이 군에서 다시 신도군이 분리되었다.
행정구역은 용천읍과 북중(北中)·용암포(龍巖浦)·진흥(辰興) 등 3개 노동자구, 산두(山斗)·서북(西北)·동신(東新)·신암(新巖)·용송(龍松)·양서(楊西)·견일(見一)·용연(龍淵)·쌍학(雙鶴)·수성(秀城)·덕흥(德興)·서석(西石)·덕승(德升)·장산(長山)·인흥(仁興)·학흥(鶴興)·쌍룡(雙龍)·동하(東下)·오흥(五興) 등 19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용천읍이다.
이 군은 압록강과 신의주시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삼교천에 의해 형성된 기름진 삼각주 평야지대이다. 토양은 산림갈색토양·논토양·충적지토양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산림은 군면적의 4%에 지나지 않으며 주요 수종은 소나무이다. 연평균기온 8.5℃, 1월 평균기온 -9.2℃, 8월 평균기온 23.5℃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50㎜이다. 첫서리는 10월 24일경, 마감서리는 4월 7일경에 내린다.
농경지는 군면적의 90% 이상이며, 그 중 논이 75%를 차지한다. 토양·수로·기후·지형 등 자연·지리적 조건이 농사짓기에 적합해 벼의 단위당 수확고와 생산량이 도내에서 가장 많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콩 등이다. 과일도 많이 나고 오리도 많이 키운다.
또한 수산자원도 풍부해 조기·굴·멸치·갈치가 많이 어획되며, 용암포는 어업전진기지이고 조선소가 있다. 용암포조선소는 최대 건조능력 2만 톤이며 3,000명의 종업원을 보유하고 있다.
공업은 기계제작공업과 조선공업이 발달했으며, 생산제품은 디젤기관·냉동기·천정기중기와 각종 쇠사슬 등이다. 또한 지방공업은 식료·일용품·방직·피복·신발·건재공업 등이 이루어진다. 1991년 2월 14일 용천광산기계공장의 생산능력 확장공사가 완료되었다.
교통망은 철도·자동차·해상운수가 발달했으며, 평의선이 군의 중앙을 통과하고, 용천역에서는 다사도선이 분리된다. 평양-신의주, 용천-염주-피현-용암포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수상운수로는 용암포를 통하는 압록강의 하천운수와 연해해상운수가 있고, 용암포-비단섬-신의주 사이에 여객선과 화물선이 운항된다. 쌍학리와 신암리에는 선사유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