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배상요구조서 ()

현대사
문헌
1949년 한국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 4가지 조항을 수록한 문서. 외교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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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9년 한국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 4가지 조항을 수록한 문서. 외교문서.
개설

조서의 서문에서는 한국이 대일배상을 요구하는 정당성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 국민의 자유의사에 반한 일본단독의 강제적인 행위로서 정의·공평·호혜의 원칙에 입각치 않고 폭력과 탐욕의 지배이었던 결과 한국 및 한국인은 일본에 대한 여하한 국가보다 최대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인 것이며,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을 자주독립 시킬 결의’를 표명한 카이로선언이나 또는 이 ‘선언의 조항을 이행할 것’을 재확인한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지배의 비인도성과 비합법성은 전세계에 선포된 사실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일 배상의 응당성은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 이미 포츠담선언과 연합국 일본관리 정책 및 포리 배상사절단 보고에 명시되어 있는 것을 명백히 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대일 배상청구의 기본정신은 일본을 징벌하기 위한 보복의 부과가 아니고 희생의 회복을 위한 공정한 권리의 이성적 요구에 있는 것이다.”

이 조서는 지역적 범위를 38도선 이남으로 국한하고, 1949년 9월 1일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정부에 의해 조사된 결과를 기초로 작성된 것이다. 각 부처에 대일 배상청구에 관한 세목과 그에 대한 증빙자료를 첨부할 것을 지시하여, 제출받은 세목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것이 이 조서였다. 그러나 그 증빙자료는 한국전쟁 중에 소실하여 현재는 조서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편찬/발간 경위

1948년 8월 한국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기획처·법무부 등 정부 일각에서는 장래의 한일관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태동하였고, 이에 따른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49년 2월 이승만정부는 대일강화(對日講和)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기획처 기획국 산하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對日賠償請求委員會)를 설치하여, 은밀하게 배상청구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기획처장인 이순탁(李順鐸)의 총괄 하에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물이 「대일배상요구조서」였다.

서지적 사항

이 조서는 두 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제1권은 1949년 3월 15일 완성되었다. 그 내용은 1949년 3월 1일 현재 판명된 현물피해, 즉 지금(地金)·지은(地銀)·서적·미술품 및 골동품·선박·지도원판 등 일본에 반환을 요구할 현물의 목록이었다. 1949년 4월 7일 정부는 이 조서를 동경의 연합군사령부에 보냈으나, 연합군사령부는 이 문제는 ‘장래 한일 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제2권은 같은 해 9월에 완성되었는데, 제1권의 현물피해를 제1부에 포함시킨 다음 제2부부터 제4부까지를 새롭게 작성하여 추가시켰다. 그 내용은 제1부: 현물, 제2부: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단순한 채권·채무관계를 규정한 확정채권, 제3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중에 한국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 제4부: 일제가 강제공출 등의 형태로 저가격으로 수탈함으로써 발생한 손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조서가 제기하고 있는 대일 배상의 항목과 그 근거는 500페이지를 상회하는 방대한 양으로 서술되었다.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에서는 ‘현물’의 반환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반환을 요구한 현물은 1) 금·지금(地金) 및 금화, 2) 지은(地銀), 3) 서적, 4) 미술품·골동품, 5) 선박 등 5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2부에서는 ‘확정채권’으로서 1) 일계통화(日系通貨), 2) 일계(日系) 유가증권, 3) 상해불화(上海弗貨), 4) 보험금·은급(恩給)·기타 미수금, 5) 체신관계 특별계정 등 5개 항목으로 나누어, 그 채무를 요구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에 기인한 인적·물적 피해’의 배상을 1) 인적 피해, 2) 물적 피해, 3) 8·15전후 일본관리의 부정행위에 의한 피해의 세 항목으로 나누어, 각각 그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조서는 인적피해에 대하여 “본 요구는 일본정부의 관계법규와 각종 사업장의 제 급여규정에 의한 모든 미수취금과 동원에 의해 받은 당사자 및 그 가족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물적 피해에 대해서는 “전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일군의 병력보충으로 인하여, 이미 설립한 병사(兵舍)만으로는 병력을 수용할 수 없어, 각처의 대건물(주로 학교 교사)을 병사로 대용하거나 혹은 그 부근에 진지를 축설(築設)·주둔하였던 관계상, 이로 인한 건물의 피해 및 물품의 파손·분실 등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므로, 이의 원상 회복비를 요구한다”고 하여, 배상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일본정부의 저가수탈에 의한 피해’로서 주로 강제공출에 의한 손해에 대하여 배상을 제기하고 있다. 총액 약 310억 엔에 달하는 규모였다.

의의와 평가

대일배상의 정당성을 밝힌 서문에서, ‘전쟁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나, 한일합방과 일본의 조선통치 자체가 불법이며 부당하다는 인식 아래, 대일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전쟁배상 성격의 청구를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배상청구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서명국으로서 참가가 좌절된 1951년 이래 대폭 축소·재조정되는 과정을 거쳐, 청구권 요구로 변하게 된다. 1952년 2월 20일 제1차 회담의 청구권위원회 1차 회합에서 한국 측이 제출한 ‘8개 항목의 청구권요구’는 1949년 작성한 「대일배상요구조서」의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그 규모와 항목을 축소·재조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한일회담: 제1공화국의 대일정책과 한일회담 전개 과정』(박진희, 선인, 2008)
「이승만 정권과 한일회담: 제1차 회담을 중심으로」(이원덕,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 2004)
집필자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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