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유학생의 학술 장려 및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가 1910년 강제 해산되자.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중심이 되어 1912년 10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로 이름을 바꾸고 사무소를 동경에 두었다. 처음에는 유학생 친목단체로 발족했으나 뒤에 민족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고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웅변대회·체육대회를 열고, 졸업생축하회·신입생환영회 등을 통해 회원간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23년 9월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한국인 유학생 1,000여명이 학살되면서 배일열이 한층 높아지고 회원도 늘어나면서 세력이 확대되어, 1929년에는 회원수 2,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학우회의 활동에서도 나타났듯이,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의 문화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내순회학술강연단을 조직하고 순회강연을 실시했는데, 일제 관헌의 조사에 의하면 배일독립정신을 고취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강연이 중단, 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1927년 이후 국내에서 동맹휴학사건이 빈번히 일어나자, 학우회에서는 재동경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의 이름으로 “전조선학생은 궐기하라.”는 격문을 국내에 보냈다. 그리고 유학생대회를 개최한 뒤 독립운동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국내운동을 지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