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18년 11월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하는 웅변대회에 ‘풍기와 사상’이라는 연제로 참가하였다. 이 때 일부 유학생들이 영웅주의라는 이름 아래 주색(酒色)에 빠져가는 현상을 경고하고 조국의 주권회복을 위해 대오각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1918년 12월 1일 『재펜 애드버타이저』지에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국제사회에 한국독립을 요구하기로 한 기사와 재미동포사회에서도 강화회의에 대표파견을 시도하고 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를 보고 지금이야말로 조국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29일과 30일 이틀간 학우회 주최 망년회와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유학생들과 의견일치를 보았다.
1919년 1월 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다시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구체적인 독립운동 실행방안을 협의, 결정하였다. 이 날 최팔용(崔八鏞)·전영택(田榮澤)·서춘(徐椿)·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최근우(崔謹愚) 등과 같이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실행위원 10명은 조선독립청년단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작성, 발표하기로 하고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송계백을 대표로 밀파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국내로 잠입해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오세창(吳世昌)·현상윤(玄相允) 등 민족지도자와 접촉하며 유학생들의 결정사항을 통고하고 공동계획추진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국내사정이 여의하지 못함을 알고 분리해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정노식(鄭魯湜)이 희사한 거사자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선언서 작성과 준비공작에 착수하였다.
1919년 2월 8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400여 명의 유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실행위원 10명 중 이광수(李光洙)·최근우를 제외한 8명과 같이 기소되어 금고 7월 15일형을 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