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개성출신. 일본 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이 기회에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재동경유학생을 규합하여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결성, 독립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초 국내의 민족지도자와 연락하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동경(東京)에서 2·8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대표 1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1월 여운형(呂運亨)이 일본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가서 한국의 절대독립을 주장하였다. 그 뒤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하였으며 이 대학을 거쳐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귀국,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여운형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참여, 총무부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그리고 외무부장 대리로 선임되었다. 1960년 사회대중당 창당 결성을 추진하였으며, 1961년 5.16 후 피검되어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