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2월 10일 경기도 개성에서 인삼거상 임진문(林鎭文)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926년 3월 개성 만월공립심상소학교, 1931년 3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상법을 공부하다가 1937년 4월 중퇴했다. 1938년 11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9년 5월부터 1941년 1월까지 조선총독부 사법관시보로 대구지방법원 및 동 검사국에서 근무했다. 1941년 1월 대구지방법원 예비판사를 거쳐 같은 해 3월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대구지방법원 판사 재직 중 1941년 11월 일본은 곧 망할 것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한 혐의로 체포된 박수암(朴守岩)의 재판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으로 발령받아 해방 때까지 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 10월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48년 9월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1월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었다. 1951년 7월 대전지방법원 법원장, 1954년 9월 서울지방법원 법원장, 1959년 12월 서울고등법원 법원장에 임명되었고, 1960년 11월 퇴직했다.
1961년 2월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1971년 4월 서울변호사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5년 4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5월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11월 11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