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 ()

정치
인물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
이칭
우촌(牛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72년
본관
문경(聞慶)
출생지
경상북도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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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정의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
개설

본관은 문경(聞慶). 호는 우촌(牛村). 경상북도 문경 출생. 전경준(錢京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성악(朴城岳)이다. 제1·2·3·5·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1년 11월 5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빈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1915년 향리의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월반하여 1917년 4학년 때에 서울로 올라와 고학하였다.

하숙집사환 · 학교급사 등을 하고, 김성수(金性洙) · 송진우(宋鎭禹) · 한용운(韓龍雲) 주위에서 심부름을 하며 고학을 하다가 1920년 5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922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유학시절에 반제국주의적 경제조직체인 ‘한빛’을 조직, 이선근(李瑄根) · 이하윤(異河潤) · 권오익(權五翼) 등과 활약하였다. 1926년 6월 ‘한빛’의 동지 10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은 물론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동경유학생계는 ML당(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로 나누어 있었는데, 신간회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지부 설치에 즈음하여서는 이론적 체계가 밑받침이 되어 협동조합운동사를 그 핵심체로 만들었다.

1928년 귀국하면서 협동조합운동사의 본부를 서울로 옮겨 조직 확산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허일(許一) 등과 민족단일당운동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일제경찰에 붙잡혀 신의주에서 2년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구금되었다. 함경남도 갑산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부임했으나 불온분자로 추방되어 금강산 · 오대산 등지에서 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정당통합운동 · 우익노동활동 · 청년운동 · 정당활동과 노농대중을 위한 활동, 남북통일대비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그의 당시 활동은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고 반공활동을 바탕으로 한 특징이 있다.

처음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간여하다가 한국민주당 발기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유진산(柳珍山) · 김산(金山) 등과 흥국사(興國社)를 조직하고 신민당(新民黨)이 결성되자 노동부위원이 되어 청년운동으로 전환하였다. 같은 해 가칭 ‘대한민국임시정부지지 청년운동후원회’를 결성하고,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과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협동조합운동사 재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노동부장, 대한노총총연맹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을 창립하고, 런던대회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으며, 이 연맹의 아시아지구대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이 대회 상임이사가 되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제2차 대회에서 다시 이사가 되는 등 국제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1년 12월 부산의 조선방직 쟁의를 계기로 이승만의 대변인격인 강일매(姜一邁)와 대립한 이후 이승만과 결별했다.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5년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며 노농당(勞農黨)을 창당하여 위원장이 되고, 1958년 ‘국가보안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 1959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과 전국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의 재야세력과 정치활동을 함께 하였으며, 같은 해 민족주의민주사회당을, 1960년 5월에는 한국사회당을 결성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1963년 민정당(民政黨)발기에 참여하고 제6대 국회의원, 1965년 민정당 부총재에 올랐으며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지도위원을 지냈다. 한일회담을 반대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운동투쟁위원회’에 참여하고 1964년 ‘한국민주통일국민협의회’에 참여,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1972년 4월 22일 별세했다.

저서

저서로 『건국이념』 · 『협동조합운동의 신구상(新構想)』 · 『민족위기와 혁신세력』 · 『자유협동주의』 등이 있다.

참고문헌

『우촌전진한입지전』(삼이사, 1967)
「반공 투쟁의 선봉장, 우촌 전진한」(임송자, 『내일을 여는 역사』27, 2007)
「나의 편력」(전진한, 『매일경제신문』, 1969.3.11.∼1969.4.4.)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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