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언론인, 역사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뒤 1932년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 주간,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 상무취체역, 1937년 만주 만몽산업주식회사(滿蒙産業株式會社) 상무취체역 · 전무취체역, 안가농장개척사무소(安家農場開拓事務所) 소장 등을 역임하며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 협화회(協和會)의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1934년에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따른 한국 역사 서술에 반대하며 진단학회(震檀學會)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2년만주 오상현(吾常縣)대동농사학교(大東農士學校) 교장을 거쳐,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이 되었다.
그 해 9월 귀국하여 조선청년동맹 위원장, 조선청년당 최고위원을 거쳐, 1946년 반탁학생총연맹 고문, 한성일보사 주필, 1947년 대동청년당준비위 부위원장 · 부단장 겸 훈련원장, 기관지 대동시보사(大同時報社)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학생처장을 역임했고, 특히 1948년에는 ‘화랑’과 ‘화랑도’를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기반으로 제시한 『花郞道硏究』를 펴내기도 했다. 1949년에는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서리를 역임하였다.
1950년 2월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정훈감, 대학학도의용대 총지휘관을 거치면서 정훈에 크게 공헌하였다. 1952년 준장으로 예편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복직하였다. 1953년서울대학교에서 『조선근세사연구(朝鮮最近世史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문교부장관이 되어 국사편찬위원회를 설치, 위원장을 겸하면서 조선왕조실록 영인작업을 개척하여 학계와 문화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뒤 1956년동아대학교 교수, 1957년성균관대학교 총장, 1957년 이후 한국사립대학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미국 및 서구 각국, 동남아시아 및 대만의 교육제도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1962년경희대학교 교수 · 대학원장, 1969년 대한민국 문화재위원장(현, 문화유산위원장), 1969년영남대학교 총장, 1972년 문화재보호협회 회장, 1974년동국대학교 총장,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1968년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법학박사,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1년 미국 인디애나주 볼 스테이트대학(Ball State大學)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생 동안 한국근대사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20여 권의 저서와 50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1983년 1월 9일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동작동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저서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한국학논총(韓國學論叢)』(하성이선근박사고희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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